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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 볼링을 쳤다. 그런데 볼링을 왜 '친다'고 하는 건지. 볼링은 '하는' 게 아닌가. 이건 마치 '축구를 찼다'와 같은데. 아마도 볼링공으로 핀들을 치기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테니스도 친다고 하고 탁구도 친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채 따위로 공 따위를 치는 운동들이네. 그러면 볼링은 '친다'보다는 '한다'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굴린다'는 아닌 것 같고. 아무튼 bowling을 play 했다. 볼링장에 갈 때마다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치열하고 살벌하게 경쟁하는 분위기라기보다 깔깔깔 웃고 떠드는 분위기. 승부라 해봤자 음료수 내기 정도의 가벼운 대결. 상대방을 이기려고 악을 쓴다기 보다, 내 점수 기록을 경신하는 데 더 집중하는 종목. 그래서 서로 얼굴 붉힐 일이 매우 드문 매너 있는.. 2015. 9. 29.
여유 서울에서 천 원으로 즐길 수 있는 가장 여유로운 여유. 여전히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눈에는 나무와 들풀만이 들어온다.적당한 북적거림. 바람 맞으며 피곤한 눈과 귀 정화. 대신 다리는. 150920덕수궁, 서울 2015. 9. 21.
<프로즌> : 의도한 용서 "당신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잖아요. 고통과 함께 살아요." -낸시 (낸시가 아그네샤에게 한 말이지만, 실은 랄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용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용서는, 용서하는 자의 위대함을 나타낸다. 동시에, 용서받은 자는 무엇을 느낄까. 용서한 사람에 대한 무한한 고마움이겠거니 생각하기 쉬운데, 이 연극은 그렇게 말하지만은 않는다. 반대로 용서받은 사람이 느낄 처절한 자괴감에 주목한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나 같은 놈도 용서하는 사람이라니, 그에 비하면 나는 도대체 무언가" 강한 것에 한없이 뻗대다가도 유한 것에 꺾이는 것이 또 사람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평생을 아무런 죄책감 모르고 산 사람, 당연히 아무것도 안고 갈 것이 없던 사람. 어떤 강.. 2015. 9. 3.
「나는 편의점에 간다」 : 거대한 무관심 한 카페에서 보고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재밌는 문구가 있다. '저희의 입은 무겁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문장이었는데 그 뒤에 부연도 있었다. 떠올려보면 '다시 와줘서 고맙다. 당신의 파트너(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를 말하는 거겠지)는 바뀌었지만, 우리는 이전의 일을 절대로 지금의 파트너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식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거대한 관대다. 당신이 이곳에서 주고받았던 많은 말들과 당신이 다른 사람과 나누었던 모든 행위들을 눈감아 주겠다니.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카페로다. 우리는 그러한 카페에서 비로소 마음 편히 커피를 홀짝일 수 있다. * '나'는 편의점을 애용한다. 편의점에는 없는 게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그 '거대한 관대'가 편의점을 찾는 큰 이유이리라. .. 2015. 8. 19.
노느다 이거 가져다가 노나 먹어라들. 연세 지긋한 노인 분들께서 사탕 한 움큼 쥐어주시며 하시는 말씀이다. '노나 먹으라'는 표현을 들으며, 나는 어른들의 유머가 보통이 아니구나 생각했었다. '나눠'를 '노나'라니, 일상의 말 속에 깨알 같은 재미라 할까. 억지로 비교하자면 통기레쓰 같은. 거꾸로 말하기는 치매 예방에도 좋다는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알아서 예방하고 계셨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단어 공부를 하던 중에 충격적인 발견을 했다. 노느다 〔노나, 노느니〕 「동사」 【(…과) …을】【…을 …으로】((‘…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여럿임을 뜻하는 말이 주어로 온다))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누다. '노느다'란 말이 있을 줄이야. 역시 알수록 어려운 국어의 세계. 점점 사라져 가는 말들. 왠지 아련하구나. 2015. 7. 30.
어른의 안부 어른을 한참을 피해 다녔다. 그것도 제일 큰 어른을. 눈이 좋아 멀리서 그 어른이 보이기만 하면 멀찌감치 돌아갔다. 화장실에 들어가다가도 그의 뒷모습이 보이면 차오르는 배를 부여잡고 도로 나올 지경이었다. 어른을 스쳐가는 것만도 어려운데, 한번 마주쳤다하면 직면을 해야하니, 애써 피했던 것. 전에 두어 번 길게 직면하고 나서 더 겁이 났다. 어른의 '그 말씀'을 차마 따를 수가 없었고, 그 따를 수 없음을 소신 있게 말씀드릴 수가 없어 어영부영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갔고. 그 넘어간 게 민망하고 그것이 나를 더 움츠러들게 하여 더 무섭고, 그랬다. 아무튼 피했다. 피하기만 해서는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한동안은 인사도 쭈뼛거리며 병자같이 하다가, 이건 정말 꼴보기 싫겠다 싶어, 얼.. 2015. 7. 27.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하셨거늘, 한낱 들꽃도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다는데. 설마 무엇을 입어야할 지 고민ㅡ고민까지는 아니고 의식ㅡ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해봤다. 누군가 그랬었지. 학교 다니면서 한 청바지만 하도 입고 다녀 나중에 벗었더니 바지가 꼿꼿이 섰다는. 이 참에 단벌 신사가 돼야겠어. 그 염려에 쏟을 여력이 없다. 2015. 7. 10.
<문제적 인간 연산> "나는 더 이상 이 낡은 기둥과 고색창연한 서까래 밑에서 살지 않겠다. 썩고 썩어서 부패한 냄새가 대궐 곳곳에서 풍기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단 말이다. 지금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은 이 낡은 기둥이며 저 썩은 세상의 서까래를 부수는 일이다. 파괴다 파괴!" - 연산 *"불알 없는 것들이 나의 심정을 알아주는구나." -연산 *"누구랑 살게요? 저 혼령들이랑 살 것이오?" - 녹수 *"나는 싸웠다. 이겼다. 그런데 왜 내 손을 들어주지 않는거냐?" -연산 *"피묻은 손 못 들어줘요." -처선 "당신과 함께 피바다를 건너왔는데" -녹수 낡은 서까래, 썩은 기둥 다 뜯어내고 새로운 집 지어보겠다고 그 소동을 피우고 보니 그의 곁에는 피바다를 함께 건너온 아내 녹수도, 오직 그의 심정을 알아주던 불알 없는 심복.. 2015. 7. 10.
안개꽃 꽃집에 들러 꽃을 샀다. 그녀는 길 가다 꽃을 보면 이따금 갖고 싶다 말하곤 했는데, 이제야 샀다. 사실 꽃집에 갈 때마다 다소 주눅이 들곤 하였다. 남자가 꽃집에 들어가는 건, 여자 속옷 가게에 들어가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 꽃에 대해서 워낙 모르기도 하여 주인이 '찾으시는 꽃 있으세요?'하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꽤나 당황스럽기도 하고. 쭈뼛거리며 꽃집에 들어서서 무얼 살까 둘러보는데, 전에 그녀가 무심코 안개꽃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나, 자신 있게 안개꽃을 달라고 주인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 주인이 가리키는 온실 안을 보니 평범한 흰 안개꽃 뿐이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별 수 없이 주인의 추천을 기대해야 하나 고민하다 무심코 탁자 위에 놓인 분홍빛 안개꽃을 발견하였다. 이것이다 싶어 별 .. 2015. 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