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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시22

「울지 않는 아이」 : 울음 아이는 울음이 '말'이다. 배고프다는 말도, 덥다는 말도, 똥 쌌다는 말도 모조리 울음으로 터뜨려버린다. 울음이 다 같은 울음이냐 하면, 그게 아닌 거지. 아이의 울음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도 솔직한 마음. 고로 아이의 울음을 듣고서 운다고 혼내고 시끄럽다고 때리는 건, 본인은 들을 귀가 없는 귀머거리라는 증거. 아이를 고립시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내리는 훌쩍임에도 폭설같은 오열에도 마음 다해 반응해주어야겠지. 비단 눈 앞의 아이를 대할 때만이 아니라, 내 머릿속의 아이에게도, 아이같은 애인에게도. *** 아주 조용하죠. 내 머릿속에서 훌쩍임들이 멎고 흘러나오던 콧물도 얼었어요. 꺽, 하는 뭔가 한꺼번에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를 분할했지요. 다음에 온 고요는 쌔근거렸어요. 여진일까요? 정말 아이들은 잠에 빠.. 2016. 6. 13.
「어머니의 나라말」 : 가깝고도 머나먼 나에게도 가장 가깝고도 머나먼 존재. 가까운 어머니와 머나먼 女子.최 여사의 나라말을 나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궁금한 게, 이 나라에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몇은 있으시지요? 한집 사는 사람은 아니겠고)부디 있으셔야 합니다. ***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부터벌교 사람이었지만어머니는 오랫동안혼자 '여천떡'이었다 이름이 따로 없다가내가 학생이 되고서야 가끔씩생활기록부 속에서'이청자'씨가 되었다 밥도 부뚜막에서 혼자 먹고늘 맨 뒤에서 허둥지둥무언가를 이고 지며 따라오던 사람모두가 잠자리에 든 뒤 들어왔다새벽녘이면 슬그머니빠져나가던 사람 어디선가 빌려와언젠간 돌려보내줘야 할딴 나라 사람 같던어머니 가장 가깝고도 머나먼소라와 조개가 많이 난다는 나라어머니의 그 나라말을우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ㅡ「어머니.. 2016. 6. 13.
「삼십세」 : 유아적 나는 안락한 유모차에 앉아 있다. 밥 줘요, 물 줘요, 만지고 놀 게 필요해요, 하며 엄마를 올려다본다. 엄마는 아무데도 올려다보지 않고 밥 주고 물 주고 만질 걸 준다. 아, 편하다 여기. 여기서 일어나면 올려다볼 엄마가 없어지는 건가. 어쩐지 일어나기 싫었어. 무심코 엄마의 다른 표정이 보인다. 女子가 막막하고 부친 표정으로 유모차를 놓지 못한 채 좁은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려 삽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는 안 그런 줄 알았다. 엄마도 어딘가를 올려다보고 싶어하는 女子인 줄을 난 몰랐다. 엄마도 올려다볼 데가 있었다면 나처럼 유아적이고 싶었을 거다. 그런 엄마를 두고 도대체 나는 얼마나 방향을 제대로 틀려고 이 나이 되도록 후진만 하는 건지. 지금도 나의 손은 간신히 핸들만 쥐었다 폈다.. 2016. 6. 13.
「라이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기분 그때마다 발생하는 기분따라 하지 못해 얼마나 아쉬웠던지. 하지만, 그때마다 발생하는 기분따라 했다가 후회했던 적이 훨씬 많다. 아쉬움과 후회 사이에서 잘 예측하고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겠지. 그래도, 기분 혹은 '몇 분 전의 느낌'에 힘입어야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 기분이 사그라들고 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그런 것. 연애의 시작도 아마 그 중 하나. 기분은 확실히 필요하다. 나의 기분도 당신의 기분도. 기분의 일치. *** 탁자의 단순한 힘에 기대어나는 사라진 라이터들과 한통속이다당신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서는당신이 주머니에 넣어 간 그 기분이 필요하고 당신의 얼굴을 돌려세우려면양손의 의지보다 확실한몇 분 전의 느낌들이 필요한데입술이 끌어모으는 결.. 2016. 5. 18.
「오래 사귀었으니까요」 : 만약 그런 식의 말이라면 나도 모레 아침까지라도 할 수 있는데. 만약 늘 곁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 지 방법도 모를 것이고(당장 달려가도 시원찮을 때에 앉은자리에서 뜨개질이라니, 근데 뜨개질밖에 생각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지금 연락을 해야할 지 말아야 할 지 청승맞게 탭댄스를 출 거고(장문의 문자를 썼다가 이모티콘을 지우고, 느낌표를 마침표로 바꾸고, 몇 개의 단어를 지우고, 결국 다 지우고, 주춤주춤), 오지 않을 그의 연락을 두 귀 쫑긋 세우고(환청이 들리기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못하겠지. 오래 사귀면 내가 사라진다는 말도 알 것 같다. 네가 없는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더라. 혼자서 뭘 해봤어야 말이지 몇 년 동안. *.. 2016. 5. 17.
「어느 육체파 부인의 유언장」 : 기증 시를 읽고 나서, 내 육체는 어디에 기증하면 좋을 지 생각해 보았다. 생각나는대로 마구 나열해 보자면, 뻗치는 직모는, 서툰 미용 수습생에게, 연습용 마네킹으로(연습해 두세요, 나같은 손님을 위해). 속눈썹은, 아리땁지만 적은 숱의 속눈썹이 못마땅해 반영구 속눈썹 연장술을 받으려는 이름 모를 여인에게, 액세서리로. 활자를 좋아하는(좋아하기만 함) 내 눈은, 글 읽기가 고역인 어느 이과생에게로(단, 가끔씩 뾰족한 물체를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발바닥은, 나의 꽃같은 20대에, 내 삶 최초로 여행다운 여행으로서, '멍때리며 걷기'의 첫걸음을 마침내 디뎠던 땅끝 해남에, 발바닥 형상의 동상으로. 온 몸의 털은, 춥디 추운 전방에서 밤낮으로 경계작전을 할 무모증의 군인에게, 방상내피로. 답답한 목소리는, 배.. 2016. 5. 14.
「아름다운 약관」 : 스물 내 나이는 갓 스물. 나의 껍데기만 보고 번듯한 사람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돌고 돌다 어지러워도 또 돌아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이려는 사람이니, 내 나이는 스물이 맞다. 세상은 뭐 이리 요구하는 것이 많고, 이미 갖춘 사람을 찾는지. 정해진 약속은 모조리 거대한 쪽의 편인 것도 같고. 개의치 않는다. 비리비리한 신출내기 나가신다. 아무리 손에 쥔 게 전무한들, 세상이 제시하는 정해진 틀에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아름다운 약관의 시절은 오지 않았으므로. 곧 다가올 약관의 시절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고 싶다. 배고파도 아름답게. *** 그들은 묻는다 약관에 동의합니까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아름다운 약관의 시절은 오지 않았으므로 ㅡ「아름다운 약관」中, 『다정한 호칭』, 이은규 2016. 4. 5.
「마음 한철」 : 엉뚱한 대답 때로는 엉뚱한 대답이 더, 진지한 고민과 진실한 반응으로 들린다. 최소한 "그럴까?"하는 무모한 동의나, "싫어"하는 단호한 거절보다는 솔직하게 들리지 않나? 시인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잘 모르긴 모르겠어도. 싫지 않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태,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였을까. ***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ㅡ「마음 한철」中,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 준 2016. 4. 4.
「구름을 집으로 데리고 가기」 : 동심 하늘을 보며 구름 속에서 숨은그림찾기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 아래 가만 놓아두어도 하루종일 뛰어놀 수 있었던 날들(그땐 아이폰도 없었는데. 아이폰이 뭐야, 우리집엔 겜보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을 찾아내 놀곤 했다(그땐 구름뿐 아니라 화장실의 타일에서도, 기하학적인 무늬의 벽지에서도, 이따금 동물들, 친구들, 귀신들과 만나고는 했다. 혼자놀기의 진수). 그때나 지금이나 하늘의 구름은 늘 그 모습 그 자리인데(라고 말했지만 아닌 것 같다. 그때의 하늘이 더 새파랬고, 그때의 구름이 더 뭉게뭉게 풍성했다.) 지금은 어째서 고개 들어 하늘 한번 쳐다보기가 어려운 건지. 땅만 쳐다보게 된 데에는 저마다 많은 사연이 있겠지 아무렴. 이제라도 고개를 들어 그때 그 동물들과 친구들과 귀신들을 찾.. 2015.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