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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소설30

「무지개풀」: 우리가 노는 방식 풀을 하나 가지고 싶다고 P는 생각했다. -95쪽 K와 P가 노는 방식이 참 재밌다. 좁아터진 거실에 거대한 별모양 풀을 놓다니. 엉뚱하다. 아내도 풀을 갖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거실 복판에는 절대 두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질색하는 건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집에서도 발뒤꿈치를 살며시 들고 걸어야 하고, 분리수거도 철저히 해야하며, 말할 때도 조금은 숨을 죽여야 한다. 아내가 두고 싶어하는 풀은 따로 있다. 거실에 두는 작은 고무풀 말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왔다갔다하려면 족히 오십 미터는 헤엄쳐야 하는 규모의 진짜 풀. 허무맹랑으로 듣지 않는다. 아내가 원한다면 유럽의 소도시 어딘가로 풀 제작을 위한 준비탐사를 떠날가도 한다. 아내는 지금도 길 가다 기다란 공터만 보면 풀을 .. 2020. 3. 30.
「서울의 바깥」: 인서울 이 소설을 읽다 보니 내 얘긴가 싶었다. 나도 '나'처럼 공시생이었다. 나도 공부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167쪽). '나'는 실패가 두려워 누군가에게 공무원 준비한다고 걸 숨겼다는데, 나는 실패가 두렵지 않았고 끈질기게 웬만큼 하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리기도 했었다. 당장 취직하고 돈 벌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핑계가 되었던 것도 같다. 공부를 하다 보니 '나'처럼 어느 순간 나도 돈이 필요했다. 공부 첫 해에는 모아놓은 돈도 조금 있어 괜찮지만 해가 갈수록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가 아주 창피해진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168쪽) 과외나 할까하는 마음에 찾은 게 교육회사 간판을 단 한 회사였고 거기 들어가 자세히 보니 역시 과외전문업체였다. 교육의 질보다는 양을 따지는 '회사'였는데 그.. 2020. 3. 29.
「너무 한낮의 연애」 : 서툶 정말로, 처음은 서툴 수밖에 없다. 필용은 바보같게라도 따져나봤지, 난 사랑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을 속절없이 보내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너무 한낮'이었네, 시작도 끝도. 에고. 누가 볼 땐 애들 장난 같은 연애였지만, 그때의 사랑은 나름 진짜였고, 다만 사랑을 대하는 태도가 서툴 뿐이었다. 양희의 사랑 없음도, 필용의 서툶도 이해한다. 사랑은 느닷없이 생길 수도, 단박에 사라질 수도 있다. 그것도 아주 무덤덤하게 그리고 서툴게. 만약 서서히 생겼다가 점차 시들해지는 게 사랑이라면,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랑'이라는 관계는 지금보다 아마도 훨씬 다양하고 복잡했을 것.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에, '거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녀 사이에서의 사랑은 더더욱. 사랑한다, 사.. 2016. 5. 2.
「파란 책」 : 하이데거를 아시나요? 사람들(원래 내 얘기 하기 싫을 때는 남 얘기처럼 하곤 한다)은 왜 책 본 걸 꼭 그렇게 티내려고 할까요. 티내지 맙시다(막 배운 티만 난다). 또 어디든 적용하려 하지 말고(특히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말자). 나 배운 걸 남에게 어설프게 써먹어봤자 상대에게는 겨우 '입 벙긋거림'으로 보일 뿐입니다(누가 공들여 써 놓은 리뷰 따위, 공들여 읽은 적 있나? 쭉 내려 댓글 한번 보고, 별 거 없으면 몇 초 내로 넘기고 말지). 무슨 말인지 모를 뿐 아니라, 관심이 없어요. 재수만 없지요. 배운 건, 능숙한 운전기사처럼 완전히 몸에 익어 내가 그걸 배웠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절로 몸이 반응하듯), 그때 우러나오는 게 아닐까요. 행여나 누가 하이데거 같은, 있어 보이는 이름 대면서 아냐고 물으면 그냥 모른.. 2016. 4. 20.
「홍로」 : 거짓말 뭐 이런 이야기. '그녀'가 한 거짓말은 누구를 위한 거짓말이었을까? 처음은 '그'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나중에도 과연 그랬을까. 폰팔이 아들이 과학선생이라니. 얼마나 짜릿한가. 거짓말은 참 매혹적이다. 그녀에게 주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을 거다 아마. 비록 거짓말이라도, 거짓말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내가(혹은 내 아들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던 거야?'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부심. 그게 그녀를 움직였겠지. 결국 나중에는 '그녀 자신'을 위한 거짓말이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거짓말하고 나서 그녀는, 누구보다 더 즐거워보였고, 목소리 톤도 낮은 '도'에서 심하게는 높은 '레'까지 올라갔고, 애정 표현도 자연스러워졌고, 걸음걸이도 당당해졌으니까. 아마도, 그녀에게 거짓말은 더이상 거짓말이.. 2016. 4. 18.
「대니」 : 호의 왜 그렇게 짜증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순수한 친절이자 호의에서 나온 듯 보이는 그의 살가운 태도가 몹시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것이 실은 내게 친절도 호의도 베풀어주지 않는 타인들에 대한 짜증이라는 사실을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145p와줘서 고마워. 양갱 사다준 것도 고맙고, 생일 축하해준 것도, 미안하다고 해준 것도 고마워. 그런데 이제 오지 마. 앞으로는 우리 연락하지 말고 보지도 말자. 무슨 말이냐면, 앞으로는 너와 연락하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다는 말이야. 네가 잘해줄수록 나는 괴로워. 알겠지? -162p 복수 엄마도 복수가 살갑게 굴 때마다 신경질을 내곤 했다. 복수가 돈을 갖다줘도 사람 죽이고 번 돈만 아니면(아니, 사람 죽이고 번 돈이라도 본인만 모르면) 괜찮다며 당연한 몫으로 넙.. 2016. 3. 11.
「산책」 : 할수없음 "나는 자기랑 결혼한 거 후회하지 않아. 나는 당신이 영원히 저 집의 초인종을 누르지 못한다고 해도 변함없이 자기를 사랑할 거야, 알지?""하지만 당신이 저 집의 초인종을 누른다면 난 좀더 편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나는 말이야...... 당신을 정말 사랑하지만......지금은 마음이 너무 불편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불안한 거야. 나는...... 내 마음을 자기가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226p "(생략) 할머니는 내게 문을 열어주고 방으로 들어가서 바로 돌아가신 거야.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자기야, 사랑하는 자기야, 나는 그래서 초인종을 누를 수가 없어." -227p 남자가 초인종을 누르지 못한다고 해도 변함없이 남자를 사랑할 거라는 여자. 하.. 2016. 3. 9.
「삼풍백화점」 : 기억 유니폼을 입은 판매원들 서넛이 계산대 근처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들었어? 아까 오 층 냉면집 천장 상판이 주저앉았대. 웬일이니, 설마 오늘 여기 무너지는 거 아니야? 오늘은 죽어도 안 돼! 나, 새로 산 바지 입고 왔단 말이야. 그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55p 맞다, 건물이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말은 사실 까르르 웃어 넘길 일이다. 그렇지만 웃기지도 않게 그 건물은 무너졌고, 오늘은 죽어도 무너지면 안 된다던 그녀는 물론 그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아마도)죽고 말았다. '나'의 친구 'R'도. * 취업하고 나서 바쁜 모양인지 아무런 연락도 없던 스물네 명의 친구들. 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직장에 들어가고는 친구에게 연락은커녕 씻고 자기 바빴다. "친구라는 게 다 그렇지 뭐... 2016. 3. 8.
「이인실」 : 참는데 이골이 난 거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무엇이든 참지 못하는) 아버지의 이기적인 푸념을 한참 듣던 (참는 데는 이골이 난) 엄마는, 아버지가 씩씩대며 방으로 들어가자, 한참 지나서 내게 속내를 꺼냈다. 불현듯 리모컨을 티브이에 던지면 티브이가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고 했다. 본인이 그런 충동이 들었다는 것에 너무 놀랐고, 이래서 사람들이 홧김에 사고를 저지르게 되는 건가고 사뭇 깨달아졌단다. 엄마는 그런 충동을 누르고 누르다 이번에 터뜨리지 않으면 울화가 치밀 것만 같아 리모컨을 던졌다. 티브이에는 아니고 바닥에. 그마저도 차마 선을 넘지 못하는 절제된 강도로, 겨우. 얼마나 박살내고 싶었을까. 티브이도 아버지도. 난 엄마가 하고 싶은 말 못하고 속으로 쌓아만 가는 게 걱정된다고 했다. 그 말에 엄마는 잠깐 침.. 2016.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