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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55

「무지개풀」: 우리가 노는 방식 풀을 하나 가지고 싶다고 P는 생각했다. -95쪽 K와 P가 노는 방식이 참 재밌다. 좁아터진 거실에 거대한 별모양 풀을 놓다니. 엉뚱하다. 아내도 풀을 갖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거실 복판에는 절대 두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질색하는 건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집에서도 발뒤꿈치를 살며시 들고 걸어야 하고, 분리수거도 철저히 해야하며, 말할 때도 조금은 숨을 죽여야 한다. 아내가 두고 싶어하는 풀은 따로 있다. 거실에 두는 작은 고무풀 말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왔다갔다하려면 족히 오십 미터는 헤엄쳐야 하는 규모의 진짜 풀. 허무맹랑으로 듣지 않는다. 아내가 원한다면 유럽의 소도시 어딘가로 풀 제작을 위한 준비탐사를 떠날가도 한다. 아내는 지금도 길 가다 기다란 공터만 보면 풀을 .. 2020. 3. 30.
「서울의 바깥」: 인서울 이 소설을 읽다 보니 내 얘긴가 싶었다. 나도 '나'처럼 공시생이었다. 나도 공부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167쪽). '나'는 실패가 두려워 누군가에게 공무원 준비한다고 걸 숨겼다는데, 나는 실패가 두렵지 않았고 끈질기게 웬만큼 하면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리기도 했었다. 당장 취직하고 돈 벌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핑계가 되었던 것도 같다. 공부를 하다 보니 '나'처럼 어느 순간 나도 돈이 필요했다. 공부 첫 해에는 모아놓은 돈도 조금 있어 괜찮지만 해가 갈수록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가 아주 창피해진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168쪽) 과외나 할까하는 마음에 찾은 게 교육회사 간판을 단 한 회사였고 거기 들어가 자세히 보니 역시 과외전문업체였다. 교육의 질보다는 양을 따지는 '회사'였는데 그.. 2020. 3. 29.
『웅크린 말들』: 쉬는 모습은 따로 없어야 했다 느그 뱉고 싼 추저븐(더러운) 것들 한 달을 닦아도 느그 놈들 하루 껌값도 못 번다니. 씨벌, 매시꼽다(매스껍다). - 『웅크린 말들』, 이문영, 후마니타스 (2017) 2013년쯤이었나. 돈 좀 벌어야겠다 싶어 한 대학병원에서 기능원으로 일 년쯤 일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공부한답시고 고정수입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머니가 가벼워질수록 어깨도 축축 처질 때였어서 뭐라도 좀 해보자는 마음이 컸고, 새벽같이 출근해서 낮이면 퇴근할 수 있어 오후부터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게 또 컸다. 가 보니 채용구조는 호텔이든 병원이든 똑같았다. 중개업소를 통해 들어가는 방법이 유일했다. 그 중간다리는 한 달에 월급을 오십 만원씩 떼 처먹는 곳이었는데 그렇게 지랄같아도 일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었다. 차라리 벼룩의 간.. 2020. 3. 29.
「울지 않는 아이」 : 울음 아이는 울음이 '말'이다. 배고프다는 말도, 덥다는 말도, 똥 쌌다는 말도 모조리 울음으로 터뜨려버린다. 울음이 다 같은 울음이냐 하면, 그게 아닌 거지. 아이의 울음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도 솔직한 마음. 고로 아이의 울음을 듣고서 운다고 혼내고 시끄럽다고 때리는 건, 본인은 들을 귀가 없는 귀머거리라는 증거. 아이를 고립시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내리는 훌쩍임에도 폭설같은 오열에도 마음 다해 반응해주어야겠지. 비단 눈 앞의 아이를 대할 때만이 아니라, 내 머릿속의 아이에게도, 아이같은 애인에게도. *** 아주 조용하죠. 내 머릿속에서 훌쩍임들이 멎고 흘러나오던 콧물도 얼었어요. 꺽, 하는 뭔가 한꺼번에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를 분할했지요. 다음에 온 고요는 쌔근거렸어요. 여진일까요? 정말 아이들은 잠에 빠.. 2016. 6. 13.
「어머니의 나라말」 : 가깝고도 머나먼 나에게도 가장 가깝고도 머나먼 존재. 가까운 어머니와 머나먼 女子.최 여사의 나라말을 나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궁금한 게, 이 나라에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몇은 있으시지요? 한집 사는 사람은 아니겠고)부디 있으셔야 합니다. ***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부터벌교 사람이었지만어머니는 오랫동안혼자 '여천떡'이었다 이름이 따로 없다가내가 학생이 되고서야 가끔씩생활기록부 속에서'이청자'씨가 되었다 밥도 부뚜막에서 혼자 먹고늘 맨 뒤에서 허둥지둥무언가를 이고 지며 따라오던 사람모두가 잠자리에 든 뒤 들어왔다새벽녘이면 슬그머니빠져나가던 사람 어디선가 빌려와언젠간 돌려보내줘야 할딴 나라 사람 같던어머니 가장 가깝고도 머나먼소라와 조개가 많이 난다는 나라어머니의 그 나라말을우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ㅡ「어머니.. 2016. 6. 13.
「삼십세」 : 유아적 나는 안락한 유모차에 앉아 있다. 밥 줘요, 물 줘요, 만지고 놀 게 필요해요, 하며 엄마를 올려다본다. 엄마는 아무데도 올려다보지 않고 밥 주고 물 주고 만질 걸 준다. 아, 편하다 여기. 여기서 일어나면 올려다볼 엄마가 없어지는 건가. 어쩐지 일어나기 싫었어. 무심코 엄마의 다른 표정이 보인다. 女子가 막막하고 부친 표정으로 유모차를 놓지 못한 채 좁은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려 삽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는 안 그런 줄 알았다. 엄마도 어딘가를 올려다보고 싶어하는 女子인 줄을 난 몰랐다. 엄마도 올려다볼 데가 있었다면 나처럼 유아적이고 싶었을 거다. 그런 엄마를 두고 도대체 나는 얼마나 방향을 제대로 틀려고 이 나이 되도록 후진만 하는 건지. 지금도 나의 손은 간신히 핸들만 쥐었다 폈다.. 2016. 6. 13.
「라이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기분 그때마다 발생하는 기분따라 하지 못해 얼마나 아쉬웠던지. 하지만, 그때마다 발생하는 기분따라 했다가 후회했던 적이 훨씬 많다. 아쉬움과 후회 사이에서 잘 예측하고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겠지. 그래도, 기분 혹은 '몇 분 전의 느낌'에 힘입어야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 기분이 사그라들고 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그런 것. 연애의 시작도 아마 그 중 하나. 기분은 확실히 필요하다. 나의 기분도 당신의 기분도. 기분의 일치. *** 탁자의 단순한 힘에 기대어나는 사라진 라이터들과 한통속이다당신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서는당신이 주머니에 넣어 간 그 기분이 필요하고 당신의 얼굴을 돌려세우려면양손의 의지보다 확실한몇 분 전의 느낌들이 필요한데입술이 끌어모으는 결.. 2016. 5. 18.
「오래 사귀었으니까요」 : 만약 그런 식의 말이라면 나도 모레 아침까지라도 할 수 있는데. 만약 늘 곁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 지 방법도 모를 것이고(당장 달려가도 시원찮을 때에 앉은자리에서 뜨개질이라니, 근데 뜨개질밖에 생각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지금 연락을 해야할 지 말아야 할 지 청승맞게 탭댄스를 출 거고(장문의 문자를 썼다가 이모티콘을 지우고, 느낌표를 마침표로 바꾸고, 몇 개의 단어를 지우고, 결국 다 지우고, 주춤주춤), 오지 않을 그의 연락을 두 귀 쫑긋 세우고(환청이 들리기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못하겠지. 오래 사귀면 내가 사라진다는 말도 알 것 같다. 네가 없는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더라. 혼자서 뭘 해봤어야 말이지 몇 년 동안. *.. 2016. 5. 17.
「어느 육체파 부인의 유언장」 : 기증 시를 읽고 나서, 내 육체는 어디에 기증하면 좋을 지 생각해 보았다. 생각나는대로 마구 나열해 보자면, 뻗치는 직모는, 서툰 미용 수습생에게, 연습용 마네킹으로(연습해 두세요, 나같은 손님을 위해). 속눈썹은, 아리땁지만 적은 숱의 속눈썹이 못마땅해 반영구 속눈썹 연장술을 받으려는 이름 모를 여인에게, 액세서리로. 활자를 좋아하는(좋아하기만 함) 내 눈은, 글 읽기가 고역인 어느 이과생에게로(단, 가끔씩 뾰족한 물체를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발바닥은, 나의 꽃같은 20대에, 내 삶 최초로 여행다운 여행으로서, '멍때리며 걷기'의 첫걸음을 마침내 디뎠던 땅끝 해남에, 발바닥 형상의 동상으로. 온 몸의 털은, 춥디 추운 전방에서 밤낮으로 경계작전을 할 무모증의 군인에게, 방상내피로. 답답한 목소리는, 배.. 2016.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