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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55

「묘씨생」 : 인간 냄새 냄새란 참 묘한 것이다. 한번 맡은 냄새는 여간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길 가다 어떤 냄새가 나면, 이 냄새를 어디에서 맡았는지 그 장면은 잘 떠오르지 않아도, 과거에 내 코가 머금었던 적이 있는 냄새라는 건 대번에 안다. 어떤 냄새는 좀 더 강렬하게 기억나기도 하는데, 지나가는 젊은이에게서 나는 향수냄새는 십여 년 전의 목도리를 떠올리게 하고, 골목의 한 상점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는 이십여 년 전 종종 가던 먼지 가득한 오락실을 기억하게 한다. 최근에 한약방을 지나면서는 이십오 년 전 먹었던 누런색 영양제가 문득 떠올랐다. 아주 어려서 친척누나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병실에서 밥을 먹어야했는데 도무지 먹지 못했다. 그 병실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도 역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병실의 구조도, 입원했던 .. 2015. 12. 5.
「성탄특선」 : 의식주 아직은 아니지만, 12월이 되면, 거리엔 캐럴이 울려대고, 가로수엔 화려한 조명이 치렁치렁 달릴 것이다. 성탄절은 하루라지만, 성탄을 축하하는 기분은 한 달 내내 이어진다.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도 (솔직히, '알 게 뭐야' 아닐까?) 누구든지 왠지 모르게 한껏 들뜰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들. 모두가 즐거워야할 때. 크리스마스. 특별한 날. 정확히는 이브가 더 특별한 날. (왜 특별하냐고? 솔직히, 알 게 뭐야) 이날만큼은 나를 뽐내고 싶지만, 아무리 옷장을 헤집어봐도 저 많은 옷들 중에 나를 예뻐보이게 할 옷은 없다. 옷이 없어 투덜거리면서도, 남들처럼 왠지 영화 한 편은 봐줘야 할 것 같고, 이날은 조금 무리해서라도 평소 잘 가지 못하던 패밀리레스토랑 정도는 가줘야 할 것 같다. 손에 리본 달.. 2015. 12. 4.
「라면의 황제」 : 라면 먹을 권리 국가가 이렇게 말한다면? ΟΟ가 술이든 담배든, 야구든 야동이든, 라면이든 복면이든, 무엇이 됐든, 이 세상에서 그것을 자유롭게 누릴 권리는 점차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ΟΟ이 영원히 사라지겠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음주운전이 사람을 죽게 해도, 늦은 밤 퇴근길 포장마차의 한잔 술은 있어야 하고, 간접 흡연이 아무리 해악이라 해도, 일하느라 하루종일 굽어 있던 허리를 펴며 입에 무는 한 가치 담배도 있어야 한다. 불법 스포츠 도박이 성행해도, 누군가는 소파에 몸을 누이고 야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성범죄자들이 야동을 즐겨본다 해도, 누군가는 숨죽여라도 야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테러리스트가 복면을 즐겨 쓴다고 해서, 누군가가 광화문 한복판에서 복면을 쓰고 활보해도 국가는 그를 진.. 2015. 11. 26.
「쇼코의 미소」 : 꿈? 재수 끝에 제법 이름 있는 사범대에 진학했다. 그로부터 이 년 전, 점수에 맞춰 아무런 관심도 없던 경제학 전공으로, 아무 생각 없이 갔던 그저 그런 학교를 자퇴하고 난 후였다. 그때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교육'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 길이냐는 물음엔 청소년들과 부대끼는 삶을 꿈꾼다고 대답했었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을 마주하면 그렇게 심장이 뛰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범대생이라는 이유로, 교육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나는 내가 걸어야 할 길을 한 길로 정해놓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길에 맞는 사람인지, 재능이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본 적도 없이. 전에 다니던 학교를 과감히 자퇴한 일은, 나에게 일종의 훈장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내 삶이 꿈을 향해 박차고 올라 자유롭게 떠다니는 모양.. 2015. 11. 25.
『빛의 제국』 : 보통사람 1. 자신을 비췄다가 이내 방향을 튼 경계등에, 기영은 큰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2. 손목에 차인 카시오 시계쯤이야, 보통사람들도 차는 것인데. 보통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이까짓 멍에쯤이야. 3. 아무리 XX한 세상이지만 이곳엔 자유가 있다. 시선과 시선의 감옥이자 어떠한 자유도 허락되지 않는 '그곳'으로 갈 순 없다. 자유로운 '이곳'에서 보통사람이고 싶다. 저마다 보통의 삶을 꿈꾸고 있다. * "......그거, 그 카시오 시계, 주십시오." / "수갑보다는 편하실 겁니다." - 381쪽 걸어가는 기영을 서치라이트 하나가 포착했다. 그는 강렬한 빛에 갇힌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의외로 편안하고 부드러운, 비로소 자기 운명을 긍정하게 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눈물이 .. 2015. 11. 13.
『사랑이라니, 선영아』: 쫀쫀하다 나의 성격을 옷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초극세사 검은색 셔츠'? 단 하나의 올도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예민함의 극한. 그렇다고 예민하단 소리는 듣기 싫어서 어떻게든 예민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삐져나온 보풀을 감추려는, 그래서 검은색인. 아무튼 '졸라 예민하고 쫀쫀한 사람'. 작년 이맘때 신발을 한 켤레 샀었다. 일주일 후면 미국엘 가야해서 멋 좀 내보려고 가죽 제품으로 장만했다. 거실에 앉아 아직 개시도 하지 않은 가죽 신발을 헝겊으로 살살 닦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성큼 다가오시더니 갑자기, 신발 멋있네, 하시며 말릴 틈도 없이 신발을 신어보셨다. 발에 맞지 않아 조금 무리하게 신발에 발을 욱여넣으셨는데, 벗고보니, 이런, 신발에 주름이 깊게 지고 말았다. '야속해도, 신으면 안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2015. 11. 5.
「모두에게 복된 새해 -레이먼드 카버에게」 : 말하자면 친구 "이 피아노, 긴 시간 안 노래했습니다. 그치?" -127쪽 *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으면 피아노는 서서히 죽어가듯이,어려서 이민 간 한 소녀에게 한국어는 거의 죽은 것이다.사람의 마음도 아마 그렇다.'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기 어려운 '그게' 오랫동안 잘 되지 않으면사람은 외로워진다.(외로운 것이나 죽어가는 것이나) 그래도 어쩌면,한번 외로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건,망가진 피아노를 조정하고 조율하는 것보다,비뚤비뚤한 글씨체를 교정하는 것보다는 쉬울지 모른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그녀에게 나는 어떤 사람.다시 "말하자면 친구"부터라도 되고 싶다. ㅡ「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2015. 11. 4.
「환절기」 : 서로의 끝을 보고도 몇 번의 환절기를 지나 온 지금, 지난 절기들을 되돌아본다. 환절기를 하나씩 넘을때마다 당신의 것들을 새롭게 하나하나 알아왔고, '이 사람과 계속 해도 되는 건지' 의문을 조금씩 지워왔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호감이라면 모를까. 몇 번의 절기들을 거치면서 서로의 끝을 보고도 서로의 편을 들어줄 수 있을 때, 어쩌면 그때부터 '사랑하는 게 맞나보다'고 말할 수 있나보다,고 말할 수 있나보다. ***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 2015. 10. 25.
「조용한 일」 : 고마운 일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한다는 강박은 넣어둬 제발.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이에겐, 말없이 그냥 있어주는 게 고마운 일. ***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ㅡ「조용한 일」,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 2015.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