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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55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 서른번째 생일 '아, 그러고 보니' 내 서른번째 생일은 외국에서 보냈다. 단 한 번도 서른 살 생일에 캐나다에서 미역국을 먹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왜 토론토였느냐 묻는다면, 생일을 함께 보낼 사람이 토론토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물론 생일을 기념하여 그곳에 간 건 아니었지만. 혹시 서른 살이 되면 무얼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고 묻는다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겠다(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너무나도 바랐던 꿈이 있었다. 다만 그 꿈이 그토록 대단한 건 줄은 몰랐다). 어쩌면 그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보다 '누구와 함께 있을 것인가'가 중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누구'가 '무엇'을 결정한다고도 믿는다. 물론 서른 살에 내 곁에 누가 있을 것인지 생각해본 것도 아니.. 2016. 2. 26.
「구름을 집으로 데리고 가기」 : 동심 하늘을 보며 구름 속에서 숨은그림찾기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 아래 가만 놓아두어도 하루종일 뛰어놀 수 있었던 날들(그땐 아이폰도 없었는데. 아이폰이 뭐야, 우리집엔 겜보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을 찾아내 놀곤 했다(그땐 구름뿐 아니라 화장실의 타일에서도, 기하학적인 무늬의 벽지에서도, 이따금 동물들, 친구들, 귀신들과 만나고는 했다. 혼자놀기의 진수). 그때나 지금이나 하늘의 구름은 늘 그 모습 그 자리인데(라고 말했지만 아닌 것 같다. 그때의 하늘이 더 새파랬고, 그때의 구름이 더 뭉게뭉게 풍성했다.) 지금은 어째서 고개 들어 하늘 한번 쳐다보기가 어려운 건지. 땅만 쳐다보게 된 데에는 저마다 많은 사연이 있겠지 아무렴. 이제라도 고개를 들어 그때 그 동물들과 친구들과 귀신들을 찾.. 2015. 12. 21.
「특별한 일」 : 최선 한때 기타를 하도 쳐서 지금도 내 손끝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다. 스타크래프트에 미쳤을 때는 쉴새없는 마우스질에 오른 손목의 안쪽이 딱딱해졌었고, 한창 공부를 많이 할 때는 오른손 중지 손톱 밑이 굳어져 감각이 없었다(지금은?). 아버지의 팔꿈치 안쪽을 만져보면 역시 딱딱하다. 거기가 어째 딱딱한가 여쭤보니, 낮은 포복 자세로 기계 밑에 엎드려 허구한 날 수리를 하다보면 그렇게 된다신다. 그동안 다친 채 집에 오시던 장면을 떠올려보면, 굳은살은 뭐 애교 수준이다. 기름독 때문인가 나뭇껍질처럼 변해버린 양손은 남자의 훈장 같은 거라고 해도, 화상 입고, 감전 되고, 여기저기 찢기고,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 비틀비틀 집으로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는 자식의 마음은 한없이 죄송스럽다. 도마뱀은 포식자에게 먹히지 않으.. 2015. 12. 17.
「변두리」 : 점멸신호 파란불이 깜빡거릴 때, 가기엔 애매하고 굳이 가지 않아도 될 때, 이때 과감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보면 때로는 경이롭다.'그러다 사고 나'라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과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가지 마라 정확하게 말해주는 빨간불 아래서, 확실한 파란불을 기다리며이미 저만치 걸어가는 무모한 사람을 넋 놓고 바라본다. 당최 건너지 못하던 사람은, 신호등이 아무리 오래 깜빡거린다고 해도, 그 길을 절대 건널 수 없다.요즘은 신호등에 친절하게 숫자도 표시되어 상황판단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지만, 속절없이 줄어드는 숫자 앞에 머뭇거릴 뿐, 그래도 못 건넌다.안전한 파란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이다.어려서 '어른이 시키기 전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교육을 철저히 배워온 까닭일 수도 있다. *** 신호.. 2015. 12. 16.
「그늘의 맛」 : 그늘을 먼저 최근 회사가 다른 회사에 매각되어 지방으로 강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친구의 불평을 SNS를 통해 보았다. 불평 한마디면 될 것을, 그 글에는 대학이며, 군대 이야기며, 전 회사(이미 매각됐으니까) 이름까지, 은근 누설돼 있었다. 나는 이 대학을 나왔고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학교, 그런데 이사와 학교가 무슨 상관?), 군에서 이 계급이었고 (사실 계급이 명시돼 있지는 않았다, 대신 직책을 적어놓는 은밀한 수법. 그런데 또 이사와 군대가 무슨 상관?), 군의 러브콜을 마다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이 회사에 당당히 입사했는데 (굴지의 S그룹. 회사가 매각되었으므로 이미 소속이 바뀌었지만, 현 회사보다는 S그룹 출신이라는 게 훨씬 중요한 듯), 왜 내 인생은 꼬일대로 꼬여,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듣보 회사.. 2015. 12. 15.
「떠도는 행성 -心經1」 : 별자리 '혼자/고립/홀로'를 억지로 '조화'한다고 해서 그게 '전체/별자리/인연'이 되는가.그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만 조심한다면 어찌어찌 될 것도 같다. 무리 짓되, 여전히 홀로이고 싶은 행성에게는 억지로 그러지 않기로. *** 그건 영원히 혼자였음에도 전체인 듯 살아온 존재들의 운명적 항해였다아니 그렇게라도 믿어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남긴 통속적인 신화였다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빛으로도 몇억 光年을 달려가야 닿는다는뭇별처럼 아득한 거리에 고립된 채 스스로가 스스로의 유혹이 되어왔고,또 죽음의 함정이었던 검은 블랙 홀. 한때는 행복이었고 지옥이었을마음의 행로를 타고 제각기 비밀에 찬 어둠의 협궤를 떠돌았던 행성들그렇듯 홀로 공전하며 타오르다가 드디어 폭발해갔던 소우주였다하루에도 천 번이고 수축하고 팽.. 2015. 12. 11.
「세상 속으로」 : 人事 사람 냄새 나는 단어들.'病/근심/자주 흰 걸레를 더럽혀야 하는 마룻바닥/퇴근길의 수박/세금/청소차가 오지 않은 골목/진흙의 옷을 입은 사람들/못 만날 약속/집/사람' 나도 이제는,더러운 골목을 다니며 더러운 옷 입은 病든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못 만날 약속을 하고, 집에 돌아가 더러운 마룻바닥에 누워, 수박 하나를 입에 물고, 당장 세금 낼 근심에 잠기고 싶다. 오랫동안 산정에 있었다. *** 나는 오랫동안 풀꽃의 생애를 노래해왔다그러나 이제는 人事에 대해서 노래하련다이제 내 몸이 바라는 곳, 눕고 싶은 곳은산이 아니라 물이 아니라病이 있고 근심이 있고 자주 흰 걸레를 더럽혀야 하는마룻바닥이 있는 집여름에는 퇴근길에 수박을 사고월말에는 세금을 내러 은행에 가는 마을 이제 나는 이념에 물들지 않은 .. 2015. 12. 10.
「이탈한 자가 문득」 : 궤도 나는 안다. 내가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싶어한다는 걸. 태양도 뭇별도 그렇게 한다는데 궤도가 꼭 나쁜 건 아니지 않은가고 스스로를 설득하지만 (부루마블에서 한바퀴 돌 때를 생각해봐), 그래도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아는 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그 궤도에 대한 미련을 포기할 때, 비로소 한 번이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그을 수 있나. 지금껏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궤도 안에서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그거 한번 긋고 싶다. (훗날 생길지도 모르는) 처자식 굶기지는 않는 선에서. 그래도,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분들에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 2015. 12. 8.
「오징어」 : 빛 빛이란 빛은 다 좋은 건 줄만 알았다. 오징어의 입장에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오징어에게 빛은 곧 죽음. 그러고보니 나에게도 빛의 공포가 있었다. 자전거 타고 가는 길에 마주 오는 차에서 뿜어진 강력한 서치라이트. 쏟아지는 그 찬란한 빛에, 사방이 어두워졌고, 빛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죽음까지는 아니어도 큰일 나겠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었다. 암흑 속에, 결국 무언가에 걸려 바닥에 고꾸라졌고,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데, '전짓불의 강한 불빛'을 마주했던 그들에게 그 빛은 광명이었을까, 죽음이었을까. ***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ㅡ「오징어 -여는 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유하 2015. 1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