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생이 상의를 해 온 적이 있다. '워킹 홀리데이'로 외국에 가고 싶은데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자니, 내는 이력서마다 모조리 퇴짜, 지금은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는 간다만,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는지 회의감도 들고, 나간다고 별 수 생기겠냐마는, 일단 무작정 나가보고 싶은데, 이미 그곳에 애인이 있는 상태라 부모님을 설득하기가 망설여진다는 내용이었다. 부모님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애인 따라 도피하는 모습으로 비치어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는 장황하게 조언을 해주었지만, 정리해보면 '여러 생각 말고 나가라'였다. 네 길이 애인때문에 제한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솔직하고 의연하게 설득하면 부모님도 이해해주시지 않겠느냐고. 그 동생은 모레면 출국한다. 결단력 있는 친구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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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항 속에 산다. '나'는 어항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렵다. 어항 같은 유리 파티션 안쪽에서 따분하게 일을 하고, 월급날에만 겨우 또 다른 어항인 작은 바에 들르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다가 결혼이라는 좁은 어항에 들어왔다. 직장의 사장과 결혼을 했는데, 그와는 십사 년을 부부로 살다가 사별을 했다. 남편이 떠나가고 나니, 단조롭게나마 존재하던 질서마저 없어졌다. 그동안 지나온 세월은 까마득하게 느껴지고, 앞으로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것을 걱정하던 차에 '개그맨'에게서 엽서가 왔다.
'개그맨'은 '내'가 스무 살 때 만났던 남자다. 어항 속에 살고 있던 '나'에게 마침내 손을 내민 사람이었다. 연애할 당시에는 무명이었지만, 헤어지고 나서는 누구나 알 만한 유명 개그맨이 되었다. 인기가 날로 높아지던 어느 날 개그맨은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자취를 감추고, 아무 소식도 전해 오지 못했는데, 몇 년이 지나서야 엽서를 보내온 것이다. 그 엽서가 보내진 먼 나라로 무작정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듣게 되는 건 그의 부고. '나'는 그가 그곳에서 보낸 '1권이 없는 2권의 책과 같은 삶'을 하나씩 알아간다. 개그맨의 삶에서 1권은 그 길었던 무명 시절과, 짧았던 인기와, 갑작스러웠던 추락이었다면, 2권은 그것과는 완전히 단절된 삶이었다. <버드케이지>라는 라이브 카페 같은 곳, 그곳에서 역시 무대에 오르고 연기를 했다는 점은 이전과 닮았지만, 그가 느꼈을 감정은 이전의 것과 정반대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의 시선과 '웃을 수 없어서 웃길 수밖에 없었던' 무료한 삶,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떨어진 나락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곳,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느꼈을 평화. 훗날 그의 동료들이 무대에서 보여준 평화로움이 '개그맨'의 지난 삶의 모습을 추측하게 한다. 그의 동료들의 1권 역시 예사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1권이 어떠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2권에 충실할 뿐이다. '개그맨'과 그들 틈에서 '나'의 어항은 '나'도 모르게 깨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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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항 속에 산다. 지금은 방이라는 어항 안에서 더 작은 어항인 노트북과 책 속에 갇혀 산다. 어항 속에서의 하루는 평범한 속도로 지나간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지나간 시간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 화들짝 놀란다. 그 시간 동안 어항 안에서 무얼 했는지 딱히 설명하기 어렵다. 어항 속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빨리 어항 밖으로 나가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누군가 뿌려주는 먹이만 받아 먹으며 어항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깨진 어항 밖으로 스스로 헤엄쳐 나가야 할 그 때가 오면, 나는 과연 지느러미를 움직일 것인지. 어항 밖의 삶이 뿌옇다고 해서 헤엄쳐 갈 방향마저 생각해 두고 있지 않으면 안되지 않은가.
2권의 삶을 살아갈 동생의 앞날을 응원한다. 내 삶도 2권 쯤 되려나. 1권은 평범했던 학창시절, 2권이라 생각했던 부록은 없어졌다면, 2권은 초반 몇 페이지가 흐린 필체로 중언부언 쓰이다가 지우고 지우는 그런 책일까. 사실 모든 책이 처음은 지루한 법인데, 나의 2권도 초반 몇 장만 견디고 읽으면, 아마도, 제법 읽을 만한 책이 되어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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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렇게 온몸을 부딪쳐본 적이 없다. 어느 날 나를 둘러싼 어항이 녹아버리고 늙은 내가 흘러나오는 순간이 올까 봐 늘 두려웠다. -71쪽
"그는 1권이 없는 책 같았지요.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통 말하지 않더군요." -80쪽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순수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온갖 명성과 가십에 둘러싸여 있던 개그맨이 줄에서 떨어진 광대가 된 후 누렸을 그 평화는 내 몫이 아니었다. -89쪽
나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게으름 때문에ㅡ'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퇴고 전 문장) 인생이 낭비되어버린 것을, 어떤 선택지에도 동그라미를 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동안 이곳의 누구보다 외롭고 비참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90쪽
<버드케이지>의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1권을 들추지 않는다.-90쪽
「개그맨」, 『개그맨』, 김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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