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카페에서 보고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재밌는 문구가 있다.
'저희의 입은 무겁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문장이었는데 그 뒤에 부연도 있었다. 떠올려보면 '다시 와줘서 고맙다. 당신의 파트너(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를 말하는 거겠지)는 바뀌었지만, 우리는 이전의 일을 절대로 지금의 파트너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식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거대한 관대다. 당신이 이곳에서 주고받았던 많은 말들과 당신이 다른 사람과 나누었던 모든 행위들을 눈감아 주겠다니.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카페로다. 우리는 그러한 카페에서 비로소 마음 편히 커피를 홀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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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의점을 애용한다. 편의점에는 없는 게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그 '거대한 관대'가 편의점을 찾는 큰 이유이리라. 맨 얼굴에 잠옷 차림으로 어떤 물건을 사더라도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는 편의점의 시크함. 그것이 없어지는 순간 편의점을 찾을 이유는 없어진다. 그런데 찾는 회수가 잦아질수록 관대는 관여로 바뀌어 간다. 인사를 하게 되고, 이름을 묻게 되고, 나이를 묻게 되고, 직업, 주소, 취향을 묻게 된다. 그러고선 알만큼 다 알았다는 식의 묘한 친근감을 풍기는데 그것이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다. 관대가 필요한 곳에서 관대 이외의 것은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를 관대하게 바라봐주는 곳으로 다시 찾아간다. 그곳의 관대도 잠깐이겠지만.
'나'는 새로 생긴 '큐마트'라는 편의점에서 위험한 착각에 빠진다. 큐마트에서는 관대가, 관여가 아니라 관심으로 바뀌어 간다고 느낀 것이다. 그곳의 젊은 아르바이트 청년이 겉으로는 저렇게 무심해 보여도, 내가 사는 물건들을 보고 나의 모든 삶을 자상하고 따뜻하게 파악하고 있을 거라는 이상한 기대감. 식품, 쓰레기봉투, 나무젓가락, 택배, 생리대, 콘돔을 보고 나의 식생활, 방의 크기, 가족관계, 주소, 생리주기, 성생활을 모두 알고 있는데도,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 주는 이 거대한 관심. 이러한 착각으로 아르바이트 청년에게 조심스레 마음을 여는데, 맙소사, 그 청년은 '나'를 보고 도무지 못 알아보겠다는 표정. 한마디로 편의점은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 그에게 보이기를 편의점에 찾아온 건 '내'가 아니고, '담배'이자 '생수'였던 것. 관심은커녕 그야말로 거대한 무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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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간에 뭐랄까 합이 맞아야 한달까. 관대에는 관대로, 관심에는 관심으로, 무관심에는 무관심으로. 그 합이 틀어지는 순간 어느 한 쪽은 바보가 된다. 반면에 다른 한 쪽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요즘 세상은 대개 편의점과 같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게 자연스럽다. 무관심이 필요한 시대. 어디 가든 나를 노출해야 한다는 건 꽤 성가시고 피곤한 일이다. 그렇게 무관심 속에 적당히 살다보면 그래도 나를 드러내고 싶은 곳이 하나쯤은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괜찮겠다 싶은 곳 하나 정해, 괜찮겠다 싶은 때에 민낯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순간, 이게 웬걸, 편의점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걸 금세 느끼게 된다.
나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아무것도 물어 주지 않는 거대한 관대. 우리는 그러한 관대 속에서 비로소 마음 편히 속내를 꺼내어볼 수 있다.
관심은 차치하더라도 관대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렇지만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떠나간 L군을 생각하며 짧게 적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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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번씩 편의점에서 오가는, 내가 한번쯤 만났을 수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조금 전 비디오방에서 쎅스를 한 뒤 같이 컵라면을 나눠먹는 어린 연인도 있을 테고, 근처 병원에서 아이를 지운 뒤 목이 말라 우유를 사러 온 여자, 아버지께 꾸중듣고 담배를 사러 온 백수 총각, 얼굴을 공개한 적 없는 예술가나, 실직자, 간첩, 심지어는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조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33쪽
"전공이 뭐예요?"
아마 내가 문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문학관에 대해 열변할 것이고, 미술을 전공한다고 하면 개중 유명한 미술작가를 들먹일 것이며, 이벤트학이나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말하면, 또 '그게 뭐 하는 과냐' '언제 생겼냐' '그거 졸업하면 뭐 하게 되냐' 등의 질문을 퍼부을 것이다. 그러고는 나중에 그는 나를 '안다'라고 말하겠지. -36쪽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ㅡ나의 필요를 아는 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ㅡ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은 약을 먹기 위함이며, 당신 뒤의 남자가 편의점에서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은 손을 긋기 위함이며, 당신 앞의 소년이 휴지를 살 때, 그것은 병든 노모의 밑을 닦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이따금 상기해도 좋고 아니래도 좋다. -57쪽
「나는 편의점에 간다」,『달려라, 아비』, 김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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