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격을 옷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초극세사 검은색 셔츠'? 단 하나의 올도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예민함의 극한. 그렇다고 예민하단 소리는 듣기 싫어서 어떻게든 예민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삐져나온 보풀을 감추려는, 그래서 검은색인. 아무튼 '졸라 예민하고 쫀쫀한 사람'.
작년 이맘때 신발을 한 켤레 샀었다. 일주일 후면 미국엘 가야해서 멋 좀 내보려고 가죽 제품으로 장만했다. 거실에 앉아 아직 개시도 하지 않은 가죽 신발을 헝겊으로 살살 닦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성큼 다가오시더니 갑자기, 신발 멋있네, 하시며 말릴 틈도 없이 신발을 신어보셨다. 발에 맞지 않아 조금 무리하게 신발에 발을 욱여넣으셨는데, 벗고보니, 이런, 신발에 주름이 깊게 지고 말았다. '야속해도, 신으면 안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맨해튼에서 신을 신발인데...'. 뭐라 말도 못하고 신발만 만지작거리며 속을 끓이다가, 그날 하루 종일 주름 생각만 했던 게 기억난다. 다음 날 길들인다며 신고 조심조심 밖에 나갔다 온 신발은, 반나절 만에 온통 주름투성이가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 주름이 신경쓰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아버지 그거 신고 주무셔도 됩니다, 하고 넉살을 피웠을 것을. 아니다. 비슷한 상황이 다시 와도, 나는 또 쫀쫀한 본성이 드러나지 않기가 어려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신발 조금 구겨졌다고 쫀쫀하게 구는 건 그리 창피한 것도 아니다. 자기 마음 조금 구겨졌다고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는 '졸라 예민함'이 창피한 거지. 살다 보면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구겨지는 게 마음인데, 조그만 생채기 하나 났다고 뭐 그리 야단을 부렸는지.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 왜 부러진 팔레노프시스의 가지만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점점 일그러지는 그녀의 표정도 못 보고. 쫀쫀한 내가 아직도 얼멍얼멍해지지 않은 것은 정말 사랑의 문제인 건가. 나는 분명 사랑한다는 말을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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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쫀쫀하다'는 말은 원래 옷감의 발이 대단히 고르고 곱다는 뜻이다. 쫀쫀한 인간들이 가장 살차게 구는 게 조금 삐져나온 보풀이다. -15쪽
'쫀쫀하다'의 반대말은 '얼멍얼멍하다'다. 얼멍얼멍한 스웨터라면 그 털실 한 올은 옷의 일부가 되고 쫀쫀한 스웨터라면 불필요한 보풀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게 보풀 때문이었다고 악쓰면 악쓸수록 자신이 얼마나 쫀쫀한 인간인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들 알겠지만, 그건 사람됨됨이의 문제지, 불길한 예감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왜 죽음과 같은 절망에 이르는지 아는가? 그건 스스로 무덤을 팠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광수는 그 사실을 몰랐다. -16쪽
"사랑이라니, 선영아. 무슨 소리야?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해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144쪽
넉 달 전, 광수는 결혼식장에서 팔레노프시스로 꾸민 부케를 뒤에 선 친구에게 던지기 위해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놀리는 선영의 모습을 스쳐봤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광수는 자신의 결혼에 지극히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선영이는 그때까지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145쪽
『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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