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도 나처럼 힘겹게 서른을 지나갈 누군가가 있을 거란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
*
언니, 언니를 본 지 벌써 10년이 흘렀네요. (중략) 그때는 언니가 되게 언니처럼 느껴졌는데 이제 저도 서른이네요. 그사이 언니에게도 몇 줄로는 요약할 수 없는 시간들이 지나갔겠죠? 바람이 계절을 거둬가듯 세월이 언니로부터 앗아간 것들이 있을 테죠? 단순히 '기회비용'이라고만 하기엔 아쉽게 놓쳐버려 아직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도. 말해도 어쩔 수 없어 홀로 감당해야 할 비밀과 사연들도요. (중략) 자식 노릇, 애인 노릇 등 온갖 '도리'들을 미뤄오다 잃게 된 관계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닌데. 좁고 캄캄한 칸에서 오답 속에 고개를 묻은 채, 혼자 나이 먹어갔을 언니의 청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292쪽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이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중략)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일 듯해 초조하네요. (중략)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293쪽
그때 저를 위로해준 건, 제가 직접 손을 뻗어 만질 수 있는 누군가의 체온이었어요. 욕망이나 쾌락은 그다음 문제였지요. 어쩌면 사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기는 그리 많은 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이만하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면서요. -300쪽
그때 제가 뚫어져라 보고 있던 건 10년 전, 누군가 빵집 카드 위에 또박또박 적어 놓은 바로 제 이름이었으니까요. 비석처럼 거기 그 네모난 칸에 적힌, 먼 과거에서 배달된 제 이름을 보자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거든요. -312쪽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중략)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315쪽
ㅡ「서른」, 『비행운』, 김애란
'거짓말들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편의점에 간다」 : 거대한 무관심 (0) | 2015.08.19 |
---|---|
「자오선을 지나갈 때」: 세 번째 노량진 (0) | 2015.06.25 |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함께 걷다 보면 (0) | 2015.04.24 |
「김 박사는 누구인가」 : 기원 (0) | 2015.04.18 |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 반바지라니까 (0) | 2015.03.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