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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소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함께 걷다 보면

by 새 타작기 2015. 4. 24.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1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소설을 쓴다는 건 그게 야즈드의 불빛이라고 믿으며 어두운 도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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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고통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이는 신체의 질병 때문에,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서, 또 어떤 이는 직업을 잃고 입시에 실패하여 고통을 겪는다. 고통을 겪는 이유는 사람들이 저마다 겪는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서, 고통의 가지수는 아마도 인구수와 비례할 것이다. 고통의 크기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그것이 농구공만 하여 견딜 만하다 말하고, 누구는 지구만 하여 도무지 견딜 수 없다 말하고, 또 누구는 타키온만 하여 고통이 있는 것 같지만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대는 길을 걸어가는 일은 혼자 집에서 걱정하는 일들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지내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데도 그가 말하는 실제적인 고통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자각에 이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가 지구를 던진다고 해도 사람들이 받는 건 각자의 공일 것이다. - 306쪽


너무 힘들 때는 나의 힘듦을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잘 떠오르지 않아 휴대폰을 뒤적거려보지만, 연락처에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에게도 연락을 하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반경이 겹치는 사람들, 나와 무언가를 함께 한다고 하는 그 많은 교집합의 원소들이 정작 중요한 상황에는 멀게만 느껴진다. 내 안의 이 농구공을 누구에게 던져 줄 수 있을 것인가. 나의 고통 덩어리를 함께 들어줄 사람. 이러한 요청은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하고 금세 사그러든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한 덩어리씩 짊어지고 있으니까. 지구인지 타키온인지 그 크기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각자의 공들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지. 치사하다고. 서브를 받아치려면 미리 계산을 해야만 했으니까. 난 그냥 스매싱을 하면서 땀을 쏟는 게 좋았어. 그래서 나는 셰이크핸드 그립을 한 번도 잡지 않았어." - 310쪽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제일 싫었어요. (중략) 이런 식이니까 선고를 받은 사람 앞에서 문병한답시고 찾아와선 시계 따위나 들여다보고 있는 꼴이 성에 찰 리가 없잖겠어요?" - 314쪽


가끔씩 내가 짊어진 농구공을 헤아렸는지, 그걸 같이 들어주겠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농구공을 오래 들고 있다 보면 힘이 들고 지치기 때문에, 누군가 돕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쉽게 힘듦을 털어놓게 된다. 그러나 힘겹게 마음을 열고 털어놓다 보면, 아차 싶을 때가 많다. 가만 보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 시답잖은 말로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 하려는 사람도 있고, 공감을 하는지 마는지 진중히 이야기하는 내 앞에서 딴청을 피우는가 하면, 내 힘듦은 안중에도 없이 단순히 흥미로운 사실들을 더 캐내어 보려고 이리저리 우회하며 계산된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불편하다, 내게 관심이 있다는 식의 연기.


때로는 섣부른 이해와 조언보다, 말 한마디 없이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그립다. 운동장에서 공 하나로 땀이 범벅이 되도록 함께 뒤엉키고, 말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런 것. 궁금해 미치겠어도 아무것도 물어주지 않고 묵묵히 함께 걸어주는 그런 사람. 어찌 보면 각자의 고통은 각자의 몫이고, 그건 다른 사람이 해결해줄 수가 없다. 단지 내 옆에서 함께 '산책'해주면서 너 많이 힘들구나, 그 정도만 인식해주었으면 (아니, 몰라도 좋다). 깊이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다만 함께 걸어주었으면. 걷다보면 단단해지겠지.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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