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반바지인지 팬티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나는 팬티일 거라곤 추호도 의심해본 적이 없지만) 아랫도리를 입고 있다. 멋들어진 하와이안 비치가 형광색으로 알록달록 그려진.
형네 집에 얹혀 살고 있던 어느 푹푹 찌는 여름날. 담배 한 갑 사러 나왔다가, 열쇠는 깜빡 두고 나왔는데, 아차 하는 순간 현관문은 잠겨 버렸고, 비밀번호도 모르고, 호주머니엔 달랑 천 원 밖에 없어서 갈 데는 없고. 갑자기 짜증은 확 올라오고, 에라 모르겠다, 담배를 사기로 하고. 그런데 사러 가자니 내가 입은 건 반바지인지 팬티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 아랫도리고. (이때만해도 아랫도리에 대한 고민은 필요없었다)
"총각, 아무리 더워도 그렇지, 그렇게 빤스만 입고 돌아다니면 어떡해?" (350쪽)
담배 사러 슈퍼에 갔더니, 슈퍼 주인은 돈은 받아놓고 달라는 담배는 안 주고 <쓸데없는 질문>만 한다. 나와 잠깐 실랑이를 벌이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이사람 저사람에게 물어대기 시작한다. 슈퍼에 온 고등학생 무리에게 (거기엔 여학생도 있는데), 길 가던 행인들에게, 급기야 파출소의 경찰들에게. 팬티인지 반바지인지, 이게 그렇게 물어댈 일인가. 쓸데없이.
그런데 그 쓸데없는 그게, 쓸데있는가 없는가는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였다. 생각 없이 한 일들의 풍경 위에 팬티를 한 장 덧입혀 보면 사람들의 반응이 사뭇 재미있다. 어떻게든 집에 들어가려고 이것저것 비밀번호를 연신 눌렀을 뿐인데, 무심코 나왔다가 나의 위아래를 훑고는 이내 황급히 집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이중으로 잠가버린 옆집 처자. 분명 훑을 때 시선이 팬티(나는 반바지라고 생각한다니까요)에서 멈칫. 그녀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쳤을런지. 어디 그 뿐인가. 자물쇠를 쑤셔보고자 옆집 쓰레기봉투에서 철사 따위를 찾고 있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옆집 여자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관음증 환자로 보였을 것이고, 내 방 창문을 향한 도시가스관을 잡고 빌라 벽을 등반하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혼자 사는 여자들을 노리는 성폭행범으로 비쳤을 것이다. (하필 그때 그 동네에 성폭행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고작 팬티(설마... 반바지가 아닌걸까요?) 한 장 때문에.
슈퍼주인이 그렇게 물어댔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중요한 질문이었다. 아무튼 나는 여전히 그것을 반바지로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사람들은 팬티로 보고싶어 한다.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팬티를 입히고자 한다. 내가 입으면 반바지, 남이 입으면 팬티.
# 내 아랫도리만 보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마세요. 내가 입고 있는 건 반바지...... 아니, 백 번 양보해서 팬티라 칩시다. 아무튼 난 이걸 입고도 한 치의 거리낌도 없었어요. 당당했습니다. 이 팬티는 윤리적인 팬티니까요. 나 이상한 사람 아니란 말입니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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