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그냥 '감독'만 하던 것을 아예 '기획'부터 하자는 말씀. (중략) 주어진 로케이션 안에서만 정보를 캐내려 하지 말고, 로케이션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 버리라는 말씀, 정보를 아예 만들어 버리라는 말씀. (더 넓게는 평론을 하지 말고 창작을 해서 교소도를 채우라는 뜻) (177쪽)
'SF적 상상력' (중략)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니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까지도, 모두 각하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손한 '위험'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애꿎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갔던 것이다. (179쪽)
있지도 않은 것들을 사실로 만들어 놓고 - 기획해 놓고, 그 안에서 수사를 하고/받고, 감시를 하고/받고, 고문을 하고/당하고, 급기야 왜 때리는/맞는 줄도 잊은 채 때리게/맞게 되고, 없던 죄도 만들고/만들어지고, 실종 시키고/되고, 죽이고/죽임을 당하고.
오로지 자신의 택시 운전과, 김순희와, 불란서풍 주택의 네 평짜리 단칸방만을 지키고자 애썼던 사람이었다. (134쪽)
그저 평범하게 무지했고, 평범하게 나서기 좋아했고, 평범하게 교회에 열심이었고, 평범하게(?) 외도했고, 평범한 한 가정의 아들, 딸이자 엄마, 아빠였던 사람들이었는데. 국가보안법보다 도로교통법이 더 중요했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일들을 하고, 이런 일들에 당하고 말았다. 이것을 조장했던 것은 '기획된' 사회.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전문 용어로 '눈먼 상태'),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 (179쪽)
이 세상은 두려운 한 명의 형과,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동생들로, 차남들로, 이루어진 것. (279쪽)
격동의 80년대. 대의원 투표 결과 2525표 중 2524표를 얻어, 99.9%의 득표로 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신, 우리의 큰 형님. 장남 전두환 각하. 그 형님 한분 덕에 수많은 동생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두려움에 벌벌 떨며 살았다. 나복만과 같이 드라마틱하지만 않았을 뿐. 그때의 강압과 횡포의 결과가 오늘날에도 결코 없어지지 않았을 것. 삼청교육대와 안기부, 물고문과 전기고문만 없어졌을 뿐이지(내가 몰라서 그렇지 여전히 있을 수도), 여전히 누군가의 '기획'은 존재하고(기획의 주체가 국가라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벌벌 떨며 살아간다. 강도가 예전같지 않아서인가, 무뎌져서인가. 현재 우리의 장녀께서 기획하시는 것들에 차남들이 순수히 이끌려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고 말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지하실로 끌려가는건가?
『차남들의 세계사』, 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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