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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9번의 일』, 김혜진, 한겨레출판 (2020)

by 새 타작기 2020. 4. 23.

 

뭐가 겁이 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젠가부터 생겨난 버릇이었다. -15쪽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순간은 그런 지난 시절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만한 더없이 좋은 기회인지도 몰랐다. 그의 말 한마디가 자식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점점 주눅이 들고 있는 두 노인의 마음을 조금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24쪽
부장은 서류 두 장을 내밀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그가 회사의 퇴직 제안을 거절했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하고, 재교육에 성실히 참여할 것과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서명을 하자 입을 다물어버렸다. -28쪽
그럼에도 자신이 왜 이토록 사소한 것에 마음을 쓰고 옹졸하게 굴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30쪽
그건 외부를 향한 분노라기보다는 자신의 무능함과 미련스러움에 대한 자책이었다. -31쪽
그는 그토록 어렵게 생겨난 것들이 이처럼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35쪽
도로는 푸르스름한 새벽의 고요와 적막으로 가득했다. 아침은 그것들을 흐트러트리고 무너뜨리며 천천히 돌진해왔다. -36쪽
글자가 너무 크네요. 분량도 반 정도밖에 안 되고요. -40쪽
그러니까 그는 겁 없이 앞으로만 뻗어나가는 시간에 취해 살아온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모든 게 더 나아지고 계속 좋아질 거라고 믿어온 건지도 몰랐다. -48쪽
그런 원망과 비난이 왜 하필이면 자신을 향해야 했는지 그는 알고 싶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가장 무능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을까. -49쪽
보다시피 점수가 좋질 않습니다. 아시지요? 부장은 세 번째 서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난 3개월간 그의 상품 판매 실적이 기록된 평가서였다. -60쪽
그는 부장의 제안을 수락하고 몸을 일으켜 카페 밖으로 나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 자신을 지나는 감정이 분노 단 하나뿐이라고 확실할 수 없어서였다. 어떤 순간에도 단 하나의 감정만 존재하는 경우는 없었다. -63쪽
그런 핀잔이나 충고를 듣고 돌아설 때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갑자기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였다. 자신 안의 어딘가에 금이 가고 부스러기처럼 뭔가가 조금씩 떨어지면서 점점 더 무능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자책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검단의 공장지대를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77쪽
그런 호의나 선의가 곧장 판매나 계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조심했고 말을 아꼈다. -78쪽
그는 영업이라는 것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뭔가를 판매하려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사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고 그동안 쌓인 시간과 신뢰할 만한 관계라는 것을. 그것이 그동안 자신이 보여준 친절과 호의에 대한 대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81쪽
긴 시간 회사를 통해 자신이 얻은 것과 배운 것, 바라고 원한 것. 이루고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순간들을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회사에 속해 있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그 시간들 모두를 부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85쪽
어느 때고 조롱과 야유는 쉬운 것이었다. -86쪽
그런 눈에 띄지도 않는 사소한 호의나 친절을 대단히 잘못된 것처럼 말했으므로 그는 점점 더 당혹스러워졌다. (중략) 그는 그런 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친분을 쌓고 마음을 얻고 계약을 따낼 수 있는지 되묻고 싶었다. -90쪽
나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어서 회사 나왔냐. -101쪽
아직 회사에 남아 있고, 남아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게 다만 얄팍한 월급 통장과 퇴직금 뿐이라고 생각하는지 따져 물을 기운도 없었다. -101쪽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안 된다고 하면 그런 줄 아세요. -107쪽
저랑 애들은 살아야죠. 공부도 시켜야 하고 나중엔 결혼도 시켜야 하고. 사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럼 저희는 어떡하나요? 전 돈이 필요해요. 정말 그래요. 돈이 필요해요. -118쪽
그러나 종규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내 힘없고 나약한 피해자로만 살았던 게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하고, 내내 끌려다니고, 결국 죽음까지 내몰린 희생자로만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종규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며 친구였고 동료였다. 그러니까 종규의 삶에도 타인이 결코 짐작할 수 없는 성취와 감동, 만족과 기쁨, 즐거움과 고마움의 순간들이 있을 거였다. -122쪽
어느 쪽도 아닌 중립을 지키려고 했고 어떤 순간에도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123쪽
오시는 데 힘드셨지요? (중략) 아, 물이라도 한 잔 드릴까요? -126쪽
도시락 하나 갖다줘요? -129쪽
그럼에도 허기가 좀 가시고 나자 곤두서 있던 몸과 마음이 누구러지는 듯했다. -130쪽
개놈들. 멀리 보내고 더 멀리 보내면 등신처럼 나 나갑니다, 하고 나갈 줄 아는 모양이지. -132쪽
무엇보다 그는 직무가 주어진 지금의 상황이 다행스러웠다. (중략) 그의 목소리에 깃든 긍정적인 기운은 금세 해선에게로 옮아갔다. -135쪽
제대로 열리지 않는 못 통이 바뀐 것은 나중에 알았다. 작은 플라스틱 반찬 통에 못과 나사가 종류와 크기별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는 쪼그리고 앉아 못을 고르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140쪽
그러니까 그가 회사에 기대한 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존중과 이해, 감사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바란 것뿐이었다. -168쪽
그러니까 해선을 괴롭히는 건 오늘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일들이었다. 내일을 대비할 수 없다는 사실. 대비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 그런 두려움이 아내를 몰아붙이고 있는 거였다. -168쪽
이봐요. 나도 내 일은 잘하는 사람이에요. 상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고요. (중략) 근데 여기 와서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는 바보 천지 등신이 됐어요. 그게 왜 내 탓이야? -170쪽
그는 오늘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게 뭐든 정확하고 신속하게 일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191쪽
이런 상황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입을 다물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몰두했다. -192쪽
그는 그들이 손에 쥔 것들만 빼앗을 생각이었다.  -195쪽
이놈들아! 무조건 위에서 시켰다고 하면 그만이지. 위에서 시켰다, 누가 시켰다. 네놈들은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등신들이야? 왜 시키는 대로만 해. -197쪽
일이라는 건 매일 끔찍하도록 같은 작업을 반복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노하우를 익히고 실력을 늘려가는 것이었다. 그거면 됐다. 그게 무슨 일인지, 어떤 일인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200쪽
이봐요.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통신탑을 몇 개나 더 박아야 하는지, 백 개를 박는지, 천 개를 받는지, 그게 고주파인지 저주파인지 난 관심없어요. 나는 이 회사 직원이고 회사가 시키면 합니다. 뭐든 해요. 그게 잘못됐습니까? -205쪽
그는 조금도 마음을 스지 못하고 있었다.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쪽으로 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219쪽
스스로에게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자신을 막아서기만 했다.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 하나쯤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두 가지 마음이 들끓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둔 건지도 몰랐다. -223쪽
다리 다친 개도 살필 줄 아는 양반이 이 마을 노인네들 괴롭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가? (중략) 아니지. 아니야. 확실히 해야지.  -227쪽
자신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것. -229쪽
전 더 못 하겠습니다. -239쪽
자신은 처음부터 이런 싸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고, 지금껏 자신이 한 일은 패색이 짙은 이 싸움을 끝없이 유예하면서 다만 지는 것을 미뤄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몇 년 뒤면 준오도 자신의 일을 갖게 될 거였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어떤 일을 발견하게 될 거였다. 그리고 그것이 진자 일이 되는 순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지는지 알게 될 거였다.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바뀌어버리는지 깨닫게 될 거였다. -252쪽
육체가 단련되고 익숙해지는 동안의 시간을 신뢰했다. 그 시간들이 어떤 일을 비로소 자신의 일로 만들어준다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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