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밑줄]

『읽기의말들』, 박총, 유유 (2017)

by 새 타작기 2020. 4. 27.

 

그저 책을 읽다 말다 하며 뒹굴뒹굴해야 할 아이들도 왜 책을 읽느냐고 하면 재미있어서, 혹은 딱히 할 일이 없어서라고 하기보다 "책 읽으면 똑똑해지고 좋은 대학 가잖아요" 한다. 명분도 목적도 없는 순수한 쾌락으로서의 독서가 이토록 희귀하고도 사무치게 그리운 시대라니. -39쪽
독서만큼은 경쟁을 위한 질주가 멈추는 무목적의 행위가 되어야 할 터인데 '생존봇'이 된 우리는 책을 이용하고 버리는 몹쓸 짓을 반복한다. 더 무서운 것은, 책을 대하는 방식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묘하게 포개진다는 것이다. -39쪽
투입한 시간과 비용 대비 남는 장사인지 계산기 두드리는 독서를 해 봐야 시답잖은 것만 거둔다. 한편 읽어서 아무 이득도 남기지 않는 독서야말로 가장 많은 것을 남긴다. -41쪽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43쪽
"그 누구도 중요한 작품을 모두 읽을 수는 없다" (중략) 책 이름을 모르는 것보다 길섶에서 매번 마주치는 꽃 이름을 몰라서 얼굴이 빨개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활자책보다 사람책, 자연책을 더 즐겨 읽는 세상을 위하여, 건배. -47쪽
문제는 그다음이다. 거기서 이웃의 고통을 덜어내려는 몸짓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공감이란 것은 타자의 고통 앞에 나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윤리적 알리바이가 된다. 공감하는 자아는 성찰하는 자아를 은폐하고, 연민하는 자아는 행동하는 자아를 차단한다. (중략) 읽기와 살기는 금슬 좋은 부부로 내내 짝해야 한다. -49쪽
시는 능숙하게 설명할수록 멀어지고, 이해에 포섭되지 않을수록 가까워진다. (중략) 시를 어떻게든 자신의 이해로 풀어내야 직성이 풀리는가.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어 두어야 마음을 놓는 이의 이름은 독재자다. 길들여지지 않는 시의 불편함이 당신을 불편하게 하도록 내버려 두라. -51쪽
여느 부모나 교사의 통념과 달리 나는 어릴 적엔 고전을 읽히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본다. 『레 미제라블』은 장발장이 빵 훔친 이야기가 아닌데 제목도 『장발장』이라고 달린 축약판으로 대충 겉만 핥는다. 정작 커서 고전의 참맛을 알게 될 나이에 '응, 나 저거 읽었잖아' 하면서 지나친다. 축약판이라도 재밌게 읽으면 다행이건만 억지로 고전을 읽히려다 괜한 반감만 키운다. 서두르지 말라. 살고 지고 읽고 지고 하다 보면 고전의 호출벨이 들린다. -71쪽

 

독서가 인생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여기에 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고, 이곳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이들이 많은다. 나 역시 그랬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라 자족하면서도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을 걷고 있는지 자문할 적마다 가슴 한쪽의 헛헛함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러다 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만났다. 이 묘한 작품은 미처 가 보지 못한 길일수록 내가 염원하는 바라고 믿기 쉽지만 실제로는 지금 내가 선택한 삶이 ㅡ자의든 타의든 양자가 섞였든ㅡ 내가 가장 원하던 것임을 알려 줬다. (중략) 나는 내가 선택한 운명을 살고 있다. -85쪽
내가 사람책 읽기의 달인으로 꼽는 이는 예수다. 삶을 읽어 냄에 이처럼 탁월한 독서가가 없다. 그는 당대에 인간 취급 못 받고 손가락질당하던 세리와 창녀라는 텍스트를 새롭게 읽었다. 실제로 자캐오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에게 읽힘으로 구원에 가 닿았다.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깬 여인을 제자들이 탓하자 그는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거룩한 낭비'로 읽었다. 그의 사역이란 사람을 새롭게 읽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93쪽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모든 이해는 오해라 할 수 있다. (중략) 내가 누구를 좋아함은 그를 긍정적으로 오해한 것이요, 누구를 싫어함은 부정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중략) 처음엔 그녀를 오독해서 사랑에 빠졌다고 쳐도 강산이 세 번 바뀐 지금도 여전히 오독 중이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을 창조해 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 역시 그녀에 의해 새로 쓰이고 있겠지. -95쪽
책을 읽고 배운 점을 서툴러도 좋으니 자기 문장으로 표현했을 때 비로소 마음속에 이해가 생긴다. -103쪽
우리는 어릴 적부터 놀이와 나태가 학습과 독서보다 열등하다는 차별을 내면화했다. -104쪽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적 노동을 무시하고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중략) 허드렛일이 공부다. -105쪽
견고한 사회적 불평등이 획일적인 군대에서 타파되는 역설. -115쪽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124쪽
누가 무지를 죄의 원천이라 했나. 무지야말로 복의 근원이다. -127쪽
내가 박정희와 그 딸을 용서하지 못함은 사람을 살리고자 낸 책을 사람을 죽이는 흉기로 오용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글과 책을 선물해준 신도 아마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129쪽
가장 불행한 독자는 아무리 책장을 많이 넘겨도 책이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도록 하지 않는 독자다. (중략) 비주류의 시각으로 쓴 책을 읽고 주류 사회의 틀과 궤도 밖에 서는 연습을 한다. -141쪽
중하층이 상류층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 상류층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중략) '더 높이 올라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는' 주류의 욕망을 무시해 버리면 상징폭력이든 게임의 법칙이든 더 이상 내게 작용하지 않는다. (중략) 상류층의 욕망을 비웃으며 "그런 건 개나 줘 버려. 난 생긴 대로 살 거라구" -147쪽
글자를 못 읽는 문맹이 줄자 삶을 못 읽는 생맹이 느는 역설 -149쪽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만 있으면 문득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 -154쪽
"좋아하면서도 그 나쁜 점을 알고, 싫어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점을 아는 것은 바로 남을 헤아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근본이니, 오직 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158쪽
"결코 자신의 밖으로 떨어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다" -159쪽
보통 부모는 아이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에 민감하지만 아이가 자기 행동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는 둔감하다. 자녀는 말이 아닌 실천으로 키운다지만 독서야말로 백 번 잔소리보다 한 번 솔선함이 낫다. -160쪽
"나는 이렇게 살다 갈 테니 너는 딴생각 말고" -161쪽
독서는 자율적인 행위이며 즐거움의 행위여야 한다. -163쪽
책이 출세를 보장해 주는 시대가 저문다. (중략) "얘는 서점에 와서도 핸드폰이니! 저기 가서 책 좀 읽어. 책 많이 읽어야 똑똑해지지." "진짜 책 읽으면 똑똑해져?" "그럼! 성적도 올라!"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온다. 지금 아이에게 한 말과 아까 그 책을 읽으면 부자 된다고 한 말이 다를까. 사기꾼이라고 즉결심판을 내린 그 입술로 아이에게 사기를 치는 건 아닐까. -169쪽
직종과 직급에 관계없이 하루에 여덟 시간을 성실히 일하고 난 뒤에 낮은 조명 아래 책장을 넘길 저녁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대체 그 사회가 존속할 이유가 무엇인가. -173쪽
열심히 살 의무만을 남기고 나태해질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 사회는 악하다. 오직 하나의 선택지로 겁박하는 사회에 저주가 있을지니. 밭은 숨을 헐떡이며 살도록 내모는 사회, 그렇게 살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사회, 적당한 게으름에도 그렇게 한가하냐며 죽비를 꽂는 사회는 타파되어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책장을 넘기는 일조차 절절해야 한다고 몰아세우는 책읽기 교육에 화 있을진저. (중략) 헐떡이며 이익을 추구하는 시간이 가장 무익할 수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가장 생산적일 수도 있음을 선생님도 이젠 알고 계시겠지요. 선생님, 속도와 효율의 추구는 항시 폭력과 전쟁으로 귀결되며, 느림과 나태야말로 역사의 진정한 동력임을 우리는 어느 때에 가서야 믿게 될까요. -175쪽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중략) 아이 나름대로의 좀더 잘하고 싶다는 갈망, 해도 안 될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감안한다면... -176쪽
책 읽는 사람은 강물의 등을 떠밀어 급류로 만드는 세상에서 느긋하게 맴돌 둠벙을 만드는 사람, 홀로 질주하는 여울을 손을 잡아 유유히 흐르는 대하로 이끄는 사람이어야 한다. 소로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사람이 같은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행진하지 않아도 좋은 사회, 남들은 바삐 여름을 향해 달려가더라도 나 홀로 늦봄에 머물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중략)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 -177쪽
서로의 다름이 열등감이 아닌 풍성함의 원천이 되는 사회 (중략)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서 가르치는 이가 가장 훌륭한 스승 -177쪽
가슴의 설렘을 다 좇아가면 좋으련만 벌써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선택과 집중'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183쪽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가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떄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 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187쪽 
시에 푹 빠져 밤을 새운 것은 소진한 노동력을 수면으로 회복하라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행위 (중략) 밤의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노동자가 책을 읽고 쓴다는 것은 노동자가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생각한다. -189쪽
내게 무슨 책을 선물할까 한참을 고민했다는 사실이 못내 고맙다. 누군가 나란 사람을 남몰래 정성껏 위해 주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 법이다. -201쪽
단 한 권의 책밖에 읽은 적이 없는 인간을 경계하라. (중략) 한 권의 책밖에 읽은 적이 없는 인간들이 성서를 제 입맛에 따라 어떻게 왜곡했는지 -203쪽
삶은 책보다 앞서지만 책으로 포착되는 만큼만 살아진다. -207쪽
애들은 시험이 끝나자마자 공부한 걸 다 잊어버린다. 일종의 게워 내기다. 실제로 과식하거나 음식을 잘못 먹었을 때 토사곽란에 걸리지 않으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 뇌가 터지도록 지식을 욱여 넣고 잊지 않으면 미쳐 버린다. 망각이 살게 한다. -211쪽
상담에 3년이란 시간과 1천만 원 가까운 돈을 들여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어이없게도 평범한 시간을 받아들이게 된 것, 특별한 순간이 언제쯤 나오려나 조바심 내지 않게 된 것이다. -213쪽
자신이 안온하게 독서에 몰두할 수 있었음은 미워하던 아버지의 희생 덕이었음을 고백한다.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고 구박하면서도 매번 필요한 전집을 구해 준 것 역시 아버지였다. -214쪽
나랑 결이 안 맞거나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 (중략) 내가 만민에게 사랑받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듯이 모든 책이 나를 환대해 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217쪽
나는 행하기 위해 책을 읽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쾌락을 위해 읽는데 (중략) 읽은 대로 고스란히 살아 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책을 읽고 싶어도 책이 삶에 들어설 여지도 없이 사신 어머니 같은 분들을 생각하면 책이 허락된 나 같은 인생들은 독서의 일부라도 삶으로 화답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225쪽
한 사안에 관한 즉각적인 지식과 한 사람을 향한 단정적인 발언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경험으로 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 한두 편을 읽고 자신의 입장을 확정한 다음 거기에 맞춰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이들이 너무 많다. 피아식별이 곤란한 경우에도 가차 없다. 누구든 자신의 감별기에 쑤셔 넣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의견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잘라 버린다. -229쪽
자신의 입장이 분명하지 않을 때 우리는 바보처럼 느낀다. 사안이 첨예하게 대립할수록 '네 위치가 어딘지 정해!'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중략) 독서는 이렇듯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삶을 헝클어 놓더라도 성급하게 해소하려 드는 대신 그대로 둘 수 있는 힘을 준다. '불확실성의 고통'을 견딜 뱃심을 길러 준다고 할까. -229쪽
독서를 통해 우선 제 생김생김을 알고, 나아가 생의 의미랄까 목적이랄까 그런 근본 질문에 따라 삶의 우선순위를 세우면 내 시간을 남이 가져가는 일이 줄어든다. 지배적인 삶의 방식을 답습하는 한,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쓰는 것을 부러워하고 성취와 소유로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려는 가련한 노력을 고수하는 한 대체 무슨 시간이 있겠는가. (중략)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진짜 능력이 아닐까. 이런 능력을 가진 이들이야말로 덜 벌고 덜 성공적으로 살면서 획득한 시간을 독서로 치환해 낸다. -237쪽
외롭다고 '관계'로 도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모든 문제는 외로움을 피해 생겨난 어설픈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외로움을 감내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삶의 주인으로 사는 방법이다. -239쪽
나는 신이 집필 중인 대하소설의 등장인물이면서 동시에 그 작품을 읽는 독자이고, 나아가 그 커다란 작품 안에서 내 인생이라는 작은 작품을 쓰는 작가이다. -243쪽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했잖아. 그때 '보다'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유심희 주의 깊게 본다는 뜻이야. 영어로 look이 아니라 behold라고. -245쪽
간직하고 싶은 문장을 타이핑해서 모아 두시라. 뛰어난 통찰이나 표현을 담은 문장, 나중에 기억애 뒀다 인용하고 싶은 문장, 새로운 어휘의 용례로 기억해 두고 싶은 문장 등 어떤 것이라도 좋다. 그렇게 모인 구절을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로 파일이나 폴더를 여러 개 만들어서 모아 두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도 첨언해 보라. 그런 과정에서 사고가 종합적으로 발달한다. -247쪽
읽기의 말들
국내도서
저자 : 박총
출판 : 도서출판유유 2017.12.04
상세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