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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 : 참외롭다

by 새 타작기 2015. 2. 8.

 


카스테라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3-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무규칙 이종 예술가’ 박민규 첫 소설집 『카스테라』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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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참외 그림 하나가 올라왔다. 그 그림 옆에는 '참외롭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그 밑으로는 고시원으로 보이는 곳의 사진이 두 장 더 있었다. 사진 속의 사람은 군대 시절, 두 다리 건너 이름 정도만 알던 사람이었는데, 게시글을 읽어 보니 그가 드디어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했고, 이 두 평 고시원은 그의 꿈을 이루어준 곳이라는 내용이었다. 긴 외로움을 버텨냈기에, 이제 외롭지 않아도 되는 생활들이 다가올 것이기에 고시원 밖으로 나와 참외 그림 같은 걸 올릴 수 있었겠지. 그 지긋지긋했을 생활을 마침내 청산하는 의미로. 아. 참 외로웠다.

 

'갑을고시원 체류기'에 나오는 '나'도 이런 고시원에서 살 수 있겠냐는 친구의 말에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럽지 않고, 대신 <외로웠다>고 말한다. 고시원이 대체 어떻길래. 글을 보면 고시원은 터무니없이 길고 좁고 어두운 복도가 있고, 발 뒤꿈치를 들고 다녀야만 하고, 방이라고 하기보다는 관이라고 불러야 할 사이즈고, 최저 볼륨의 쟁쟁쟁쟁도 허락되지 않고, 코는 푸는 게 아니라 눌러서 조용히 짜야 하고, 가스를 배출할 땐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방류해야 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두 사람 다 외롭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자 고시원의 사람들과도 꽤나 안면을 트게 되었다. 하지만 마주친다 해도 대개가 가벼운 눈인사에 불과했고, 대화를 한다거나 따위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는 인간들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마주치지 않고, 서로를 피하는 게 이곳의 예절이었다. (288p)

 

고시원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괜히 부끄럽다. 몇 년간 고시에 매달리는 것도, 돈이 없어 원룸을 얻지 못해 겨우 고시원에 머무는 것도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만한 게 못 되는 게 현실이니까. 개나리가 한창이고, 배추흰나비가 날고, 밀크커피처럼 봄볕은 따뜻해도 나는 아직 추운 것 같고, 완연한 봄바람에 벚꽃나무 흔들려도 나는 아직 겨울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취업이다 결혼이다 여기저기 봄날인데. 주변과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나는 더 부끄러워지고 외로워진다.

 

의외로 씩씩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세면장 겸 화장실에서 마주쳐도 여자들은 언제나 당당했고 자신의 볼일을 척척 다 보고, 서로의 방을 오가며 소곤소곤 환담을 나누기도 하고, 함께 장을 보러 가는가 하면, 그 좁은 옥탑방에서 몇몇이 어울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곳에서 <웃는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희귀한 일이었다.(288p)

 

이 곳에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는 오직 김검사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고, 누구 앞에서나 꼿꼿했으며, 무엇을 해도 늘 열심이었다.(289p)

 

현실의 무게 앞에 이처럼 '웃고 당당하기'는 참 어렵다. 난 늘 인상 찌푸렸고 움츠러 들어있었(고 지금도 어쩌면 그러하)다. 그런데 이 여자들(아마도 업소의 여급들)은 이 와중에도 웃고, 김검사(사법고시 장수생)는 이 와중에 당당하다. 어떻게 웃을 수 있고 당당할 수 있었을까. 여자들은 현재에 만족해서일까. 김검사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까. 이런 생활에 적응해서일까. 오히려 누구의 간섭으로부터 단절돼서일까. 비슷한 사람들 틈에 있어서일까.


'인생을 사는 것이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힘들다'


갑을고시원 화장실 구석에 적혀 있던 낙서의 내용이다. 인생을 사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다면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려나. 나는 힘들게 살고 있나. 인생이 고시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 내가 넘어서려는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지. 고시를 패스하려면 그 좁고 답답한 고시원에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인생을 잘 살아내려면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건지. 아마도 나는 고시원이 어디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거나, 알기는 해도 나를 엄습할 그 외로움이 무서워서 고시원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입구만 서성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외로움이 뭐라고. 아니면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서일지도. 내가 지금 애지중지 매달리고 있는 것은 한낱 <386 DX-Ⅱ>와 같은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303p)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고시원에 살았지만,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살아가는. 가는. 이렇게 저렇게 끌려가며 살아'지는' 사람들은 절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여전히 고달프지만 그 안에서도 당당하고 웃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이미 화창한 봄날의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일부러 추운 고시원으로 들어가서 작정하고 외로워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겨울이니까. 나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갑을고시원 체류기」,『카스테라』, 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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