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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김두식

by 새 타작기 2015. 1. 6.


욕망해도 괜찮아

저자
김두식 지음
출판사
창비 | 2012-05-18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한 발짝 선을 넘으면 인생이 즐거워진다!2012년 최고의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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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침 일찍 현직 장관으로부터 뭔가를 상의하는 전화를 받으면, 저는 그날 점심시간이나 강의 중에 지나가는 이야기로라도 반드시 슬쩍 그 일을 언급합니다. 학생들에게 최신 이슈를 알려줌으로써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거짓말이죠. 비행기의 아저씨와 욕망을 표출하는 방식에만 차이가 있을 뿐, 욕망의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인정 받고 싶은 거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날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는 과시 같은 거고요.

24 저에게는 글을 써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뿌리 깊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는 또다른 욕망도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욕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욕망은 그만큼 다층적입니다... 욕망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것인데, 욕망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사회의 묵시적 계율 때문에 우리 욕망은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어졌습니다.

37 진짜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유명해짐'이라는 관념 자체가 머리에 들어 있지 않은 까닭에, 유명해짐이 아예 화제가 될 일이 없지요. 유명해지지 않기로 했다는 식의 유치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유명해지겠다는 욕망의 덩어리인데다가 복잡하기까지 한 존재입니다. 욕망을 숨기려고 하다보니 사람 자체가 맑지 않습니다.

39 누군가 저를 알아볼 때 저는 불편하면서도 기분이 좋습니다. 만약 자기 감정에 정직한 사람, 자기욕망에서 진짜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훨씬 자연스럽게 상대방과 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 자리를 빨리 피해서 도망치기는 하지만, 대신 나중에 그 순간을 몇번이나 음미하고 또 음미합니다.

42 돈, 섹스, 권력, 어느 것이든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은 진보진영에서 존경받기 어렵습니다. '권력'은 얻고 싶어도 '권력의지'는 숨겨야 합니다. 권력의지를 숨길 때는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모여들지만,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진보 지지자들은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욕망을 감추고 살다보니, 남의 숨겨진 욕망이 자주 눈에 밟혀서 상대방의 욕망을 들춰내고 난도질하는 데 귀신같은 능력을 보여줍니다. 명예는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도 남의 명예를 무너뜨릴 때는 억지추론과 논리 비약을 거듭합니다.

43 오히려 저 같은 사람이 훨씬 위험합니다. 겉으로 보면 계(戒)에 속해 있지만 실상은 색(色)의 노예인 사람입니다. 색과 과도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그 노예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욕망을 잘 다독이며 평생 동행해야 할 친구로 삼지 않고, 싸워서 극복하거나 잘 숨겨야 할 적으로만 대해 온 결과죠. 이번 글쓰기는 어떻게든 욕망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겠다는 제 결심의 첫걸음입니다... 자신이 욕망의 덩어리임을 인정하고 나면 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한결 따뜻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54 최근 인기를 끄는 다큐멘터리 방식의 짝찾기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들을 정리하는 기본 프로필은 딱 두가지입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남자1호' '여자2호'하는 방식으로 이름을 빼앗고 번호를 부여하면서도 학벌만은 생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55 여전히 그게(학벌) 중요한 화제이기는 하지만, 좀 배웠다는 집단에서는 애써 그 질문을 피합니다. 촌스럽기도 하고, 자칫하면 상대방에게 결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전히 궁금증은 남습니다.

55 (그의 출신대학을 듣게 되면) 그 순간 머리가 환하게 밝아오면서 눈앞에 마법처럼 대학입시 배치표가 쫙 펼쳐집니다. 그 대학 출신인 고교 동창생의 얼굴과 함께 말입니다. 새로 사귄 유학생과 옛 동창생의 얼굴이 서서히 겹쳐지면서 이제야 새 친구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느낌이 파도처럼 밀려오지요. 그러면서 내가 내려다봐야 하는 사람인지 올려다봐야 하는 사람인지가 때로는 통쾌하게 때로는 아프게 정리됩니다.

62 학벌이란 무시무시한 장벽 앞에서 누구나 한번쯤 거짓말의 유혹을 느낍니다. 출신학교 이야기를 할 때 누구도 증명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거짓말을 해보면 주변 분위기가 당장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느끼는 똑같은 열등감, 유혹 앞에서 조금씩 선을 넘다보니 그렇게 망가지게 된 것이지요.

79 직장생활 하는 여성, 특히 좀 '자유로워 보이는 여성'에 대한 중년 남성들의 지분거림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런 (은밀한) 눈길을 보내다가 여성이 거절하면 바로 눈길을 거두는 남성은 그나마 나은 사람입니다. 자기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내는 사람들 중에 이런 유형이 많습니다. 욕망을 감추고 숨기려는 사람일수록 더 집착하고 더 미숙합니다. 상대방이 보내는 거절의 메시지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90 규범적인 '계'의 남자들은 좋은 직장과 안정된 가정을 지닌 사회지도자로 자리잡습니다. 원래는 에너지를 충분히 사용하고 누린 다음에야 어른이 되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만이 '훌륭한 어른'이 됩니다. 그저 '어른 행세'하는 법만 배운 소년들이 '훌륭한 어른' 타이틀을 거머쥐는 셈이죠. 인간이 평생 써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볼 때, 지랄이라는 실탄을 거의 사용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겉은 멀쩡한 어른인데 마음 깊은 곳 감성의 어느 한구석은 텅 빈 소년들입니다. 갈 곳을 잃은 '색'은 마음 한구석의 더 어두운 공간으로 숨어들어갑니다. 잠복한 것일 뿐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90 그런 소년이 어느날 소녀를 만납니다. 일 때문에 우연히 만난 여성이 덥석 소년의 손을 잡는 순간, 평생 '계'의 세계에서 살아온 이 규범남은 거짓말처럼 우르르 무너집니다. 그리고 일순간 '색'의 세계로 몸을 던집니다. 좋게 보면 순수하고, 나쁘게 보면 한없이 유치한 사랑놀이가 시작됩니다. 상대방과 나 사이에 자아경계가 무너지는 상태를 뒤늦게 경험합니다. 10대 소년들이 느끼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퇴행도 경험합니다. 그녀 앞에 서면 어린아이가 됩니다. 남이 보면 유치해서 쓰러질 편지를 쓰고, 낯 뜨거운 애칭을 부르며 서로를 갈망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 사랑의 결과 많은 것을 잃기도 합니다.

95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에도 그런 소년이 존재함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생양 사냥이 이성을 잃기 시작하는 시점에 잠깐 멈춰서서 '그 사람과 내가 뭐가 다르지?'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스캔들의 중심에 선 희생양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우리는 희생양 양산의 메커니즘을 깰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출발점에는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와 희생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비로소 "죄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 가슴을 울리게 됩니다.

100 젊은 세대 사이에는 서로 공격하고 상처 주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문화가 확고하게 자리잡았습니다. 누군가 상대방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칭찬하면 모두들 어색해서 견디지 못하고, 농담처럼 서로 씹고 비판하면 다 함께 웃고 즐깁니다. 웃음거리가 된 사람은 '쿨하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겉으론 함께 웃는 척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깊은 상처가 남습니다. 조금 더 고상한 형태를 취할 분 기성세대의 문화도 다르지 않습니다. '더 많이 씹을수록 더 친한 관계'라는 오해 속에서 우리는 매일 그렇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갑니다. 내면에 쌓여가는 생채기는 우리를 더 공격적으로 만들고, 희생양을 원하는 빈도는 더 잦아집니다. 사냥꾼 노릇을 열심히 하는 만큼, 어느 순간 졸지에 희생양이 될 확률도 높아집니다.

101 우리 모두가 예수의 모범을 따라, 자기 자신을 내주고 언제나 희생양 편에 서서 소수자의 입장을 옹호하며 박해자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108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깨닫자 이상하게도 제 마음에 깊은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민감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를 만난 거죠.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기로 결심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 한 귀퉁이에 약간의 여유공간을 마련할 수는 있습니다.

113 세상에는 분명히 나랑 안 맞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딱히 이유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함께 있으면 피차 불편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불편함을 처음부터 모두 궁합 탓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우선 그 불편함의 원인이 1) 나 때문인지 2) 상대방 때문인지 3) 누구의 탓도 아닌지 분석해봐야 합니다. 말을 조금 바꾸면 1) 나의 욕망 때문인지 2) 상대방의 욕망 때문인지 3) 욕망의 충돌 또는 욕망의 문제와 아예 상관없는 것인지 살펴보는 겁니다. 나 때문에 생긴 문제라면 당연히 나를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내 '행위'때문이 아니라 나의 '존재'자체 때문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내 잘못도 그의 잘못도 아닌, 그냥 안 맞는 관계인 거죠...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싸우지 않고 조용히 손을 터는 것도 지혜이자 용기입니다. 자신과 안 맞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115 궁합이 잘 안 맞는 사람이 하필 생사여탈권을 쥔 상사, 평생 사랑을 약속한 남편이나 애인이라면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끝장낼 수 있는 용기'입니다... '헤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는 것은 상대방과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기 위치를 확인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 용기 또는 에너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관계를 유연하게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관계를 끝장낼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원칙은 거의 모든 관계에 적용됩니다.

122 사람들은 흔히 강자에게 붙어 안전을 추구합니다만, 그게 결코 안전한 길이 아닙니다. 강자는 이용가치가 있을 때만 약자를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착한 태도만 가져서는 곤란합니다. 늘 착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최악의 경우 너희들을 모두 불사를 수 있다'는 내면의 결기와 에너지를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떠들고 다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로 그렇게 떠드는 사람은 대개 속이 텅 빈 사람들입니다. 마음속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눈빛으로 그 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걸 보여주지 못하고 단순히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강자의 노예 노릇만 하다가 역할을 다하면 인간정글에서 먹이로 전락합니다.

146 노골적이지 못하고 '은근하게' 표출되는 욕망은 우리 삶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부작용에 비해 효과는 너무 미미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남의 은근한 욕망을 귀신처럼 잡아내는 무시무시한 센서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은근한 욕망은 몰라도 남의 은근한 욕망은 귀신처럼 잡아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은근한 자랑을 듣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은근해도 내 자랑이 상대방에게 순수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도 은근히 아이들 얘기로 화제가 흐르기를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170 (결혼 후에는 아들의 집안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배는 존재했습니다. 어머니가 원치 않는 일을 아들이 하려 할 때면 어머니는 "네가 원하면 해야지..."하면서 먼 산을 바라보고 깊은 한숨을 몰아쉬곤 하셨습니다. 사실은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지배보다 그런 한숨이 더 무섭습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받은 자유의 분량이 얼마든, 그 부모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든, 결국 모든 자녀의 인생은 부모에게서 독립해나가는 긴 여정입니다. 특히 아들이 어머니에게서 독립하는 길은 더 멀고 더 험합니다.

216 <플레이보이>는 그만큼 사기도 어렵지만 숨기기는 더 어렵고 버리기는 더더욱 어려운 잡지입니다.

216 모범생이던 저의 내면에도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보게 된 여성지에 실린 속옷 선전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중년에 이르러 돌아보면 소년기의 넘치는 에너지는 오히려 자랑거리가 될 법한데, 그때는 자기혐오에 이를 정도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욕망에는 모범생이 따로 없었던 거죠.

221 그 중에는 선을 넘었던 상대방과 헤어졌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여학생들의 걱정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우 저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든지 그 경험을 값지게 여길 거다, 그걸 문제 삼을 사람이라면 그냥 헤어지는 편이 낫다."고 조언했습니다. 그건 저의 진심이었습니다. 한 인간의 인격은 그가 살아온 과거 경험의 총합입니다. 상대방의 과거까지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사랑이 아닌 거죠.

221 한번 잤다고 당장 관심이 식을 남자라면 차라리 빨리 자고 그 실체를 확인한 후 헤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인간과 결혼해 평생을 보내자고 순결을 지키나? 그렇게 사랑이 식은 후에 제도의 힘만으로 유지되는 결혼이 과연 행복할까? 그리고 이건 근본적으로 남성들의 문제 아닌가? 결혼 전에 천번쯤은 자위행위를 하면서 오르가슴을 느껴본 남성이 단지 여성과의 성기결합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동정'을 자랑하며 파트너 여성의 성경험을 단죄하는 게 말이 되는가? 결국 이것이야말로 가부장제도를 유지하는 핵심 아닌가?

224 고메즈 목사는 외부에 비치기를 원하는 '이미지'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진짜 자신'(real self)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진짜 자신'을 찾는 기준은 주로 '마음'이었습니다. 남의 말이나 판단이 아니라 나만이 알고 있는 진짜 나는 누구인지, 내 마음은 어떤 것에 흔들리는지, 나를 긴장시키고 두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다보면 진짜 자신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고메즈 목사에게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는 믿음(belief)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누구냐'는 존재(being)의 문제였습니다. 고메즈 목사가 말하는 자기 존재의 핵심에는 게이, 신학자, 공화당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의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를 보면서 '나답다는 것은 뭘까?'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범생 김두식에게 과연 '나답다'고 할만한 게 있기나 한 걸까? 매사에 남의 눈치를 보고 두려워하다보니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230 욕망을 누르기만 했지 살려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을 해도 영혼의 교류가 먼저고 몸은 그 뒤를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몸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몸이란 게 참 이상해서 홀대하면 할 수록 무의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 커지기만 했습니다. 갈수록 '몸의 사람'이 되어가더라는 거죠.

232 과거에 표면적으로 몸을 무시할 때는 내면에서 몸이 저의 정신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몸의 중요성을 인정하자 제 무의식은 몸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졌습니다. 사람을 일탈자와 사냥꾼으로 만드는 근본원인도 몸에 대한 억압입니다. 억압과 낙인이 없다면 일탈자도 사냥꾼도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 한번 했다고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섹스를 하는 순간 몸의 저 아래 어딘가에서 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영혼을 잡아 먹는 것도 아닙니다. 말과 글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중요한 소통수단 중의 하나가 살입니다. 말이나 글의 소통이 조심스럽고 소중한 것처럼 살의 소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233 남성이든 여성이든 젊은이들이 살이라는 중요한 소통수단을 잘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너무 가볍지도 않게 살의 소통을 배우다 보면 삶이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순결'을 지키겠다는 결심도 가치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어야겠죠. 다만 그런 선택이 타인을 감시하고 심판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자는 거죠. 정신적 사랑, 육체적 사랑, 깨진 사랑, 이루어진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 그렇지 못한 사랑, 무거운 사랑, 가벼운 사랑, 뜨거운 사랑, 차가운 사랑, 그 이름이야 어떻든 사랑은 아름다운 겁니다. 살의 소통을 즐기되 남이 어떻게 즐기는지에 대해서는 레이더를 꺼야 합니다. 남의 욕망을 엿보는 데 쏟는 에너지를 줄이는 대신, 내 욕망을 관찰하고 탐닉하고 모험에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개된 건강성과 은밀한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몸의 문화입니다. 몸을 누르는 사회에서는 여성도, 남성도,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응1) "김 교수님은 선을 지키고 살면서 스스로 누린 게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세요. 저는 오히려 교수님 같은 삶이 부러워요. 교수님은 그냥 그대로 사시는 게 어울려요."

#반응2) "애들을 다 버려놓자는 거냐? 성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 그런 식으로 낭비하냐? 결국 너도 다른 여자랑 섹스 한번 하고 싶다는 것 아니냐?"

267 아이들의 눈앞에서 모텔을 모두 없애버리기에 앞서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모텔이 많은지부터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미혼의 청춘들이 사랑을 나눌 곳이 마땅치 않고, 사회경제적 원인으로 결혼 연령이 지나치게 높아졌으며, 부모에게서 빨리 독립하는 게 불가능한 현실에서 모텔만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청춘들만 모텔을 찾는 게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혼외의 사랑이 넘쳐나는지, 결혼생활은 왜들 그렇게 불행한지, 제도로서의 결혼이 과연 법률이나 의무감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결혼제도만이 아이들에게 최선의 양육환경을 제공하는지, 불행한 부모 아래 성장하는 것보다 이혼했어도 책임을 다하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닌지도 토론해볼 만하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규범의 뿌리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이런 재미있는 화제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268 운전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교통 법규란 그런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장하고 사고를 막기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상황에 따라 제한속도롤 10킬로미터쯤 초과해서 추월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규범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입니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규범이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가 규범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남들이 규범을 지키게 만들겠다고 고속도로에서 '똥차'노릇하는 게 개혁일 수도 없고요. 구범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그 교수님은 물론 개인적으로 흠잡을 데 없고, 도덕적으로 거의 완벽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규범에 대한 그런 과도한 신뢰는 끝없는 의심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272 성서가 가르치고자 하는 법과 규범을 모두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 법과 규범에 역사적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정신으로 재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275 희생양이 만들어질 때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돌팔매질인지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사랑과 연대의 공동체를 일구어내는 출발점은 바로 규범에 대한 의심입니다. 의심의 도움으로 쓸데없는 규범들이 사라지고 나면, 꼭 지켜야 할 규범은 오히려 힘을 얻습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의심이 규범을 무너뜨리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의심이야말로 규범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토대입니다.

286 저의 타고난 기질을 인정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소득이었죠. 저는 원래 선을 훌쩍훌쩍 넘는 사람이 아님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겁니다. 평생 규범의 사람으로 살아온 저는 규범성을 탈피하기로 마음 먹은 다음에도 선을 훌쩍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선을 조금씩 넓히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안팎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금씩 어깨로 밀어가며 경계선을 넓혀온 셈입니다. 그런 나 자신이 참 보기 싫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그게 그냥 김두식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주제 파악을 한 거죠

289 태어날 때부터 동행해온 욕망을 바이러스처럼 살살 달래면서 살면 별 문제가 없는데, 이걸 없애겠다고 싸우고 불화하다보면 '멘탈붕괴'가 오는 거죠... 오래 살기 위해서는 욕망의 존재나 가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욕망을 부인하고 억압하면서 계속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것보다는 욕망과 조심스럽게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게 안전합니다.

291 서둘러 돌을 던지기보다는 경계선을 넓히는 쪽이 자기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훨씬 좋습니다.

298 하나는 너무 쉽게 돌을 집어들지 말자는 것, 다른 하나는 고백에 귀 기울이는 문화를 만들자는 겁니다.

298 모든 범죄를 그냥 덮고 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를 밝히고 처벌하되, 그가 잘못한 것 이상의 책임을 뒤집어씌워 돌로 쳐 죽이는 희생양 제의를 중지하자는 것입니다.

299 조금 늦게 돌을 던진다고 큰일나지 않습니다.

299 돌을 내려놓을 때 다른 사람의 고백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이 열립니다. 고백에 귀 기울이는 태도는 희생양 양산구조를 깨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물론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고백에도 내공이 필요합니다. 희생양을 양산하는 문화에서는 작은 고백을 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고백을 통해 고백자가 더 강해지기도 합니다... 고백과 함께 이런 내면의 힘을 다져가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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