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짜증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순수한 친절이자 호의에서 나온 듯 보이는 그의 살가운 태도가 몹시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것이 실은 내게 친절도 호의도 베풀어주지 않는 타인들에 대한 짜증이라는 사실을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145p
와줘서 고마워. 양갱 사다준 것도 고맙고, 생일 축하해준 것도, 미안하다고 해준 것도 고마워. 그런데 이제 오지 마. 앞으로는 우리 연락하지 말고 보지도 말자. 무슨 말이냐면, 앞으로는 너와 연락하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다는 말이야. 네가 잘해줄수록 나는 괴로워. 알겠지? -162p
복수 엄마도 복수가 살갑게 굴 때마다 신경질을 내곤 했다. 복수가 돈을 갖다줘도 사람 죽이고 번 돈만 아니면(아니, 사람 죽이고 번 돈이라도 본인만 모르면) 괜찮다며 당연한 몫으로 넙죽 받았고, 선물을 사다 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쉽게 하지 않았다. 복수 손에 이끌려 모처럼 밖에 나가 멋진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스테이크를 먹으면서도, 괜히 더위 핑계에다 답답하다고 신경질을 내며 얼른 집에 가자고 부추겼다. 젊어서 어떤 남자에게도 사랑다운 사랑 한번 못 받아본 까닭에, 아들이 베푸는 호의가 어색해, 다 늙은 지금,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왠지 안될 것만 같았나. 사랑은 주는 것도 어렵지만 받는 것이 더 어렵다는데, 정유순 여사는 말그대로 사랑 받을 줄 모르는 여자였다.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이 그냥 그렇게 마르고 늙어만 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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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도 그랬다. 할머니는 노인복지센터에서 마련해 준 일자리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지만 딸의 성화에 못 이겨, 눈 뜨고부터 잠 자기 전까지 손자를 돌보는 처지에 있었다. 딸 부부는 주말에 잠깐 들러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평일이 되기 전 다시 칼같이 데려다 놓는. 할머니에게 혼자만의 시간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울 만큼 힘들었지만 그걸 알아주는 이 하나 없었고, 흡사 기계 혹은 숟가락과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항상 견디기만 하면서 퍼주다가 끝나는 인생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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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도 그렇다. 주말만 되면 근처에 사는 아들내미 부부가 손자를 안고 집으로 찾아온다. 토요일 일찌감치 와서 일요일 밤 늦게 돌아가는 식. 집에 온 젊은 부부는 그때부터 해방이다. 핸드폰 삼매경 아니면, 배 뒤집어까고 거실에 누워서 텔레비전 보다가 퍼질러 잔다. 밥 차려주면 먹고, 먹고 나면 또 누워 있다,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겨우 설거지만 하고, 다시 눕는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한가하게 널부러져 있을 때, 엄마는 손자를 한시도 놓지 않고, 모든 걸 다 한다. 먹이고, 씻기고, 어르고, 달래고. 노래 불러주다, 웃겨 주다, 말 걸다, 재우다. 그걸 견디면서도 엄마는 웃고 있다. 주말드라마가 끝나야만 가는 눈치 없는 아들 내외와 손자를 배웅하고서, 엄마는 소파에 기대 짧은 한숨을 내쉰다. 월화수목금금금. 이제 잠깐 눈 붙이면 다시 월요일 시작. 엄마 인생은 정말 그런 건지. 희생만 하다가 가는 인생이어야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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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해요, 할머니. ㅡDANNY
딸과 사위는 외국에 놀러 갔고, 남겨진(나도 모르게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을 피력했음에도) 자신은 결국 손자를 돌보고 있고, 하필 그 손자는 심하게 아프고, 딸에게 손자가 아프다고 전하니 수화기 속의 딸은 애 데리고 너무 나다녀서 그런거라며 타박이고, 잘 먹지도 못하는 손자를 간호하며 병원에서 한숨도 못자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쯤, 대니에게서 날아온 메시지. 그 메시지 하나에 오늘도 생일을 그냥 지나보내던 할머니의 마음은 어루만져졌다. 양갱 사 들고 찾아온 대니의 방문은 더없이 기쁜 일이었을 테고.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말과 이제는 가라는 말이, 앞으로도 찾아와서 가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 건 잘못 들은 게 아닐 테지. (다른 사람의 감정도 조금은 읽을 줄 알아야지 -145p)
지금껏 순수한 호의를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 더 늙기 전에 바로 지금이, 엄마에게 메시지가 필요한 순간. 여전히 아름다울 때.
ㅡ「대니」, 『제59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윤이형
- 복수 엄마 = 정유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역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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