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거짓말들/소설

「삼풍백화점」 : 기억

by 새 타작기 2016. 3. 8.

유니폼을 입은 판매원들 서넛이 계산대 근처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들었어? 아까 오 층 냉면집 천장 상판이 주저앉았대. 웬일이니, 설마 오늘 여기 무너지는 거 아니야? 오늘은 죽어도 안 돼! 나, 새로 산 바지 입고 왔단 말이야. 그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55p


맞다, 건물이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말은 사실 까르르 웃어 넘길 일이다. 그렇지만 웃기지도 않게 그 건물은 무너졌고, 오늘은 죽어도 무너지면 안 된다던 그녀는 물론 그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아마도)죽고 말았다. '나'의 친구 'R'도.



*



취업하고 나서 바쁜 모양인지 아무런 연락도 없던 스물네 명의 친구들. 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직장에 들어가고는 친구에게 연락은커녕 씻고 자기 바빴다. "친구라는 게 다 그렇지 뭐. 바쁘다보면 소홀할 수도 있지 뭐. 이렇게 옷깃 잠깐 스쳤다가 지나가는 건 흔한 일이지." 영원할 것만 같이 가깝다가도 잠시만 소홀해도 금세 멀어지는 게 오늘의 인간관계가 아닐런지. 친구라 불렀던 수많은 사람들이 삶에 아주 작은 교점만 남긴 채 하나둘 기억 저편으로 흘러갔다. 그렇게 지나갔다고 해서 친구가 아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그때는 둘도 없는 친구였을 테니), 또 친구라 하기에도 어려운 '기억에서 없어진' 사람들. 오히려 그 당시에는 그리 친한 줄 몰랐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마음 속에 계속 맴도는 사람이 따로 있다. 내내 미안하고 내내 고맙고 내내 마음 쓰이는 사람. '나'에게는 'R'이 그런 사람이었다. 스물네 명도 '나'도 게으르고 무례하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친구를 대할 때, R은 '나'에게 그러지 않았다. R이 '나'에게 보여준 건 대가없이 순수하기만 했던 배려였다. 그런 사람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난데없이 전화 건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응, 너구나. R은 내 이름을 정확하게 댔다. 두 시간만 기다려봐. 서두르면 여덟 시엔 나갈 수 있어 -53p), 아직 일하지 않는 친구를 배려하며 기분 나쁘지 않게 밥을 살 줄도 알고(나는 카페 가는 거 솔직히 너무 돈 아깝더라, 차라리 우리 집 안 갈래? -54p), 백수가 날마다 마주할 고역을 헤아렸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집 열쇠를 내놓고(낮에 가 있을 데 없으면 우리 집 열쇠 줄까? 지금껏 그런 방식으로 말했던 친구는 없었다 -56p), 친구를 위해 당당히 요구할 줄도 알고(아니, 얘는 오늘 하루 알반데 유니폼을 왜 입어요? -60p), 앞에 나서서 친구의 허물을 가려주기도 하고(저 사람은 우리 아르바이트생이구요,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62p), 정작 본인은 잘못한 게 전혀 없음에도 미안함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나 때문에 괜히 미안해. 지나고 보니 내가 먼저 했어야 할 말이었다 -62p) 그런 친구.


그해 봄 내가 가졌던 그녀 -48p


R. 그해 봄에만, '내'가 아주 잠깐 가질 수 있었던 그녀. 백화점이 삼켜버린, 그리고 우리가 점차 잊어가는, 단순히 숫자로만 기억하는, 그 '501' 안에는, 이렇게 마음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 사건 이후로 이십 년도 더 지나고, 그 사이 계절은 수십 번도 더 바뀌었고, 올해도 어김없이 곧 봄이 찾아올 것이지만, 봄이 와도 누군가는 여전히 가슴이 시릴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봄이 와도 이제는 가질 수 없는 그녀'와 '봄이 더이상 봄이 아닌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



*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서초동의 백화점 건물이 느닷없이 붕괴되었고 무너진 건물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대참사의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가 제각각 고유한 개인들이었다는 것, 소중한 단 하나들이었다는 것이 오래도록 기억됐으면 좋겠다. 이 소설이 부족하나마 그 기억의 한 재현이 되었기를 바란다." ㅡ정이현


ㅡ「삼풍백화점」,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