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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소설

「산책」 : 할수없음

by 새 타작기 2016. 3. 9.

"나는 자기랑 결혼한 거 후회하지 않아. 나는 당신이 영원히 저 집의 초인종을 누르지 못한다고 해도 변함없이 자기를 사랑할 거야, 알지?"

"하지만 당신이 저 집의 초인종을 누른다면 난 좀더 편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될지도 몰라. 나는 말이야...... 당신을 정말 사랑하지만......지금은 마음이 너무 불편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불안한 거야. 나는...... 내 마음을 자기가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226p


"(생략) 할머니는 내게 문을 열어주고 방으로 들어가서 바로 돌아가신 거야.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자기야, 사랑하는 자기야, 나는 그래서 초인종을 누를 수가 없어." -227p


남자가 초인종을 누르지 못한다고 해도 변함없이 남자를 사랑할 거라는 여자.
하지만 남자가 초인종을 누른다면 좀더 편한 마음으로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여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인종을 누를 수가 없다는 남자.



*



돈없는 남자가 할 수 없는 건 생각보다 많다. '무엇을 마음껏 먹거나 사거나 어디에 가는 일'을 할 수 없는 건 일차적인 것이고, 그 일차적인 것으로부터의 움츠러듦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할 수 없음'은 이차적인 것.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을 낼 수 없는 일과 같은 경우.


결혼식도 못 올린 스무 살짜리 남자 형편이 뭐 오죽하겠나. 아마 돈이 없고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을 게 뻔하다.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저 남녀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가 보기에 별 것 아닌 그것이 남자에게는 어마어마한 '할 수 없음'일 수도 있다. 남자가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는 이유'를 여자에게 말한다. 그 고백을 들은 여자는 큰 소리로 웃더니 왜 거짓말을 하냐며 반문한다. 남자의 말이 여자의 생각대로 거짓말일 수도 있고, 정말로 어릴 적 갖게 된 트라우마일수도 있다. 그 말이 참이든 거짓이든 확실한 건, 남자는 현재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는 상태. 여자는 남자의 '그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남자가 초인종을 눌러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건지. '이러이러한 이유로' 못 누르겠다는 남자와, '이유는 됐고' 누르라는 여자.


만약 남자가 계속해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한다면 여자는 불편한 마음으로라도 남자를 사랑하게 될까. 아니, 여자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아마 여자는 남자를 더이상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녀 관계는 불편한 사랑과 편한 체념 가운데에서의 선택의 연속일지도. 마냥 편하기만 한 사랑이 있었던가. 궁금한 것도 때로는 묻지 않아 주고, 상대에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상대의 '할수없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많은 '불편함'을 감내할 때, 비로소 사랑 비슷한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것들을 못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이 갈라서는 거고. 편하고자 한다면 사랑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게 좋을지도. 내 입맛대로 사랑하는 순간, 관심이 의심이 되고, 사랑이 강요가 되는 것도 한순간일 것.



*


"자기는 오늘 뭐했어?"

"그냥 집에 있었어." -212p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혼인신고만 한, 고작해야 스무 살이 갓 넘은 남자 아이'와 '오늘도 하루종일 집에만 있었던 별볼일 없는 대학강사'가 움츠러드는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아서 끄적여봤다. 쓰고 나서 괜히 어깨 한번 쭉 펴봤다. 사실 세 남자 모두 '할수없음' 앞에 '할 수 없이' 작아져 있지만, 조금 더 당당할 필요는 있다. 없어도 당당하게.



ㅡ「산책」,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손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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