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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소설

「홍로」 : 거짓말

by 새 타작기 2016. 4. 18.

<'그'의 아내 역할을 해 주는 '그녀', 이용순 씨. 오 년 전 남편과 사별했고, 아래로 아들이 하나 있다. 아들은 휴대전화를 판다. 아내의 역할을 하는 대가로 '그'에게 월 이백만 원씩 받는 '그녀', 순전히 계약관계이다. 친구들에게 '그녀'를 보여주기 부끄러워하던 '그'가, 어느 날 대학 동창들과 함께 홍로를 따러 자고 하여 가게 된 여행. 여행 중, '그녀'는 '그'의 친구들로부터 질문 세례를 받는다. 이름이 뭐냐,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됐냐, 아들은 무슨 일을 하냐. 거듭되는 질문에 곤란해 하는 '그녀'를 대신해, '그'가 대답한다. "선생님이야." 휴대전화를 팔던 '그녀'의 아들이 단숨에 '선생님'이 된다. 거짓말은 수많은 거짓말을 낳는 법. 졸지에 선생 아들을 두게 된 '그녀'는 거짓말을 보강하기 위해 힘겹게 거짓말을 해 나간다. 가슴 떨리고 흥분되는 '거짓말의 경험'. '그녀'는 그것을 점차 즐기게 된다.> 뭐 이런 이야기.


'그녀'가 한 거짓말은 누구를 위한 거짓말이었을까? 처음은 '그'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나중에도 과연 그랬을까. 폰팔이 아들이 과학선생이라니. 얼마나 짜릿한가. 거짓말은 참 매혹적이다. 그녀에게 주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을 거다 아마. 비록 거짓말이라도, 거짓말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내가(혹은 내 아들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던 거야?'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부심. 그게 그녀를 움직였겠지. 결국 나중에는 '그녀 자신'을 위한 거짓말이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거짓말하고 나서 그녀는, 누구보다 더 즐거워보였고, 목소리 톤도 낮은 '도'에서 심하게는 높은 '레'까지 올라갔고, 애정 표현도 자연스러워졌고, 걸음걸이도 당당해졌으니까. 아마도, 그녀에게 거짓말은 더이상 거짓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



아버지는 한동안 직장 동료들에게 '작은아들은 선생'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자세한 앞뒤 맥락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거짓말을 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화를 냈다. 내가 창피하냐고. 왜 내 '있는 그대로'를 숨기려 하냐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왜 내 신분을 감추고 거짓말을 할까', 이해가 아주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 체면이 설 수 있다면, 뭐 그 정도 거짓말은 모른 체 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물론, 그 거짓말이 탄로되었을 때의 모든 상황은 순전히 아버지 몫이겠지만. 혹시 아버지 동료들을 지금에라도 갑자기 만나게 된다면, 어쩌면 나도 선생노릇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니, 나를 선생이라고 했다는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던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 톤이 지나치게 높았던 것도 같다. 아버지의 그 말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홍로처럼 새빨간 거짓말 말이다.



**



그는 그녀가 왜 행복한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믿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다섯음이나 높은 톤으로 말을 하고, 그토록 웃음이 많아지고, 그리고 거짓말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지금 어엿하게 제 앞길을 닦아나가는 장성한 아들을 두고 있었고, 우연히 마주친 남자의 관심을 받을 만한 요조숙녀였다. 게다가 생전 처음으로 남에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그녀를 궁금해했고 그녀는 그들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더이상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라, 즐거웠다. -122쪽


그들은 밤거리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둘은 영락없는 부부로 보였다. 혈기 왕성한 아내와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는 남편으로. 그녀의 걸음걸이가 달라졌다는 걸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평상시에는 구부정했던 등을 곧게 펴고 있었고 목을 어깨에 파묻듯 움츠린 모습은 간데없이 턱을 치켜든 채였다. 느릿한 걸음 대신 보폭이 좁고 빨라졌다. 그녀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오십대의 허물을 마침내 벗어던진 것 같았다. -126쪽



ㅡ「홍로」,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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