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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소설

「쇼코의 미소」 : 꿈?

by 새 타작기 2015. 11. 25.

재수 끝에 제법 이름 있는 사범대에 진학했다. 그로부터 이 년 전, 점수에 맞춰 아무런 관심도 없던 경제학 전공으로, 아무 생각 없이 갔던 그저 그런 학교를 자퇴하고 난 후였다. 그때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교육'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 길이냐는 물음엔 청소년들과 부대끼는 삶을 꿈꾼다고 대답했었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을 마주하면 그렇게 심장이 뛰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범대생이라는 이유로, 교육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나는 내가 걸어야 할 길을 한 길로 정해놓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길에 맞는 사람인지, 재능이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본 적도 없이. 전에 다니던 학교를 과감히 자퇴한 일은, 나에게 일종의 훈장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내 삶이 꿈을 향해 박차고 올라 자유롭게 떠다니는 모양으로 보일 거라는 이상한 우월감이랄까. 난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때까지만 해도.


졸업을 하고, 군에 다녀 오고 나니 어느덧 서른 줄. 남자 동기들은 큰 기업에 입사를 하고, 여자 동기들은 몇 년의 도전 끝에 교육계에 진출해 있었다. 굉장히 부러웠다. 뒤쳐졌다는 생각에 점점 움츠러들었고, 자연스레 인간관계는 끊어지고 있었다. 재능이 없다고 생각되는 이 길에, 지금까지 걸어온 게 아까워서 당장 되돌아서지도 못하고, 답답함에 (멀리는 못 가고) 잠시 곁길로만 새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몸부림칠수록 이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이 길을 어떻게 가고 있는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길을 조건 없이 응원해주는 바보같은 두 사람이 집에 있다. 무슨 모양이라도 결과를 냈어야 하는 시기가 한참 지났지만, 그들은 나에게 아무 열매 없는 이유를 묻지도 못한다. 도리어 나의 눈치를 본다. 나는 투덜대기만 한다. 지금 그들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은 왠지 떳떳하지 못한 것 같다. 뭐라도 이루어내고 그들에게 뭐라도 사들고 나타나, 그때야 잘해주고 싶다는 멍청한 생각만 든다. 나 어려서부터 자식이 어쩜 그렇게 똑똑하냐는 주변 사람들 말에 내심 흐뭇해했던 그들인데, 그 똑똑했던 아들이 왜 지금껏 자신들 품에서 홀로서기하지 못하는지 오죽 답답해할 그들인데, 나는 왜 아직도 어리광을 부리고 있나. 방문만 꼭 닫고 말이야.



*



영화를 억지로 붙들고 있던 '소유'와, 병든 할아버지 때문이든, 병든 본인의 마음 때문이든, 꿈을 접어야 했던 '쇼코'와, 멀찌감치서 내색도 못하고 힘들어하는 손녀를 지켜만 봐야 했던 '할아버지들'을 보며, 나와 나의 부모님을 생각한다. 



*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다른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268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영화 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좇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영화에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건 착각이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영화판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야기는 내 안에서부터 흐르지 않았고 그래서 작위적이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기에 억지로 썼다.270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중략)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271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상황이 나아지고 자리를 잡아서 떳떳해져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280


ㅡ「쇼코의 미소」,『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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