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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김두식

by 새 타작기 2015. 11. 16.

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


39 지금도 어딘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높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겁니다. 수능, 각종 고시, 임용 시험, 취직 시험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만, 이런 기도는 승진, 사업 성공, 국회의원 당선, 건강 등의 영역으로도 무한 확장됩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우리의 성공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우리의 실패는 하나님의 망신이 되어 왔지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많이 도와주신 까닭인지, 교회에는 실패한 사람보다 성공한 사람이 훨씬 많아 보입니다. '사람의 성공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느덧 하나의 신학이 되어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지요. 그런 분위기가 워낙 강하다 보니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이, 교회에 남아 있기가 무척 힘듭니다. (중략)


하나님의 영광은 1차적으로 '나타난 영광', 즉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무게, 탁월함, 훌륭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거나, 우리가 뭘 한다고 해서 양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리가 철저하게 세상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 제가 이번 시험에 곡 합격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막상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혹시 "네가 그 영광 돌리지 않아도 나의 영광은 충분하단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을까요?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은 뭐니?"하고 물어보실지도 모릅니다.


41 개인적인 성공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발붙일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명문 대학에 합격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에서도 환영받지만, 시험에 실패하여 정작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까지 누를 끼친 사람으로 평가절하됩니다.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무살도 되기 전에 이런 좌절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때까지 잠수를 타게 되지요. 재수 끝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화려하게 부활한다면 다행이지만, 모두가 그런 행운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시험에 실패하거나, 직장을 잃거나, 암에 걸린 사람은 가장 먼저 '도대체 교회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부터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며 교회를 떠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늘 성공한 사람들만이 넘쳐 납니다. 성공한 사람들만이 넘쳐 나는 교회를 과연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나의 비전은 곧 하나님의 비전?


45 성경 속의 어떤 이야기도 '비전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선 요셉은 능동적으로 '비전'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수동적으로 '꿈'을 꾸었을 뿐입니다. 수동적으로 꾸는 꿈과 능동적으로 갖는 비전은 분명히 다릅니다. 백 보 양보하여 그가 비전을 가졌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비전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목사님들은 요셉이 가진 비전의 실체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비전을 가졌다는 것만 강조할 뿐입니다. 형들을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이 요셉의 비전이었을 리는 없습니다.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는 꿈을 가졌을 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전의 사람' 요셉은 도대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걸 설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빌려 오는 것이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비전인 것입니다. 이런 왜곡은 우리 청년들을 병들게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명확한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요셉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지, 모든 기독교인에게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반화 덕분에 기독 청년들은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아니, 꾼 적 없는 꿈을 꾸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국무총리의 꿈을, 어떤 사람은 변호사, 의사, 교사의 꿈을 갖습니다. 각자 기도하고 꿈을 갖고 그걸 믿기만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 갖게 된 꿈의 배경에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요.


50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는 누구 한 사람, 자기 노력으로 열심히 일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원래 그런 사람,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모세가 민족을 이끌게 되고, 다윗이 왕이 되고, 다니엘이 예언하게 된 것은 자기가 소망해서, 비전을 가져서, 열심히 공부해서 그리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구 하나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람조차 없습니다. 누가 국무총리를 할지, 누가 민족의 지도자가 될지를 선택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걸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보여 주신 방향은 아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헨리 나웬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길이 세상의 길과 다른 것은 그 방향성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올라가라고 말하고, 더 높이 올라간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속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요즘 교회에서 가르치듯이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많이 베풀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한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그렇게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즘 목사님들이 가르치는 복음에 따르자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로마 황제로 세상에 오시는 것이 가장 편했을 겁니다.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영향력이 큰 자리에서 한 방에 전 세계를 복음화하실 수 있었을 테니까요. (중략)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방식의 복음화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가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터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이다"라고 선언했다 칩시다. 그러면 그날로 로마제국 전체가 복음화된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닌다. 복음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겨자씨를 키워 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황제 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는 식으로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복음 전파 방식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많이 버릴 수 있다?


52 많은 청년들이 진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이들이 생각하는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준비하신 유일한 진로 또는 직업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유일한 진로 또는 직업을 찾아내지 못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막아 엉망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깊은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특히 사법 시험처럼 성공 확률이 낮은 도전을 앞둔 학생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점쟁이처럼 용하다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목회자들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표적을 구하기도 합니다. 진로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지만 막상 알고 싶은 것은 '내가 이런 어려운 시험을 준비해서 과연 붙겠느냐?'는 미래에 대한 보장입니다. 점 보러 가는 사람의 심리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마음 상태입니다. 주변에 예언의 은사를 가진 목회자나 권사님이 아무도 없으면 성경의 기드온처럼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기도 합니다. "내일까지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게 고시 공부를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이번에는 좀더 발생 확률이 높은 사건을 기대합니다. 앗, 이번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고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실패합니다. 그리고 좌절합니다.


54 성경 인물 중 누구도 어떤 직장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신분 변화가 자유롭지 못했던 성경의 시대에 비해 현대 사회에는 직장이 많아지고 선택이 자유로워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어떤 직장을 가야 내가 행복할지를 점치는 식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직장을 가라는 식으로 좀처럼 분명하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표적을 통해 그 길을 보여 주시는 일도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런 응답들은 대게 민족을 살리거나 교회의 운명이 달린 특별한 경우에 주어진 것입니다. 혼자 비전을 갖는 것이 위험한 만큼이나 혼자 예언이나 표적을 받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고민 끝에 어렵게 결정하는 일을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 한 방으로 뚝딱 해결하려는 것도 교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예언이나 표적보다 훨씬 선명한 방식으로 이미 계시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그걸 알 수 있느냐고요? 바로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을 하라"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는 것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계명으로 하나님의 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간단한 계명도 고린도전서 13장을 묵상하게 되면 정말 가슴이 답답해지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도무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이 사랑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뿐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보다 더 명확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생의 계획과 불명확성 앞에서 고민하느라, 정작 명확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고민할 여유가 없습니다.


56 그런데 근본적으로 진로 문제가 우리 청년들에게 그렇게 깊은 고민거리가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상향성의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많이 베풀 수 있고, 더 많은 걸 가져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을 점령해 버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높이 올라가야 많이 버릴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가지 생겼습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64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비전을 가지고, 더 높은 자리로 가서, 더 잘 사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을 더 잘 살게 만들자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비전도 없이, 무조건 더 낮은 자리로 가서, 더 못 사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과 상관없는 삶을 살란 말입니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맞습니다, 비전을 가지라는 메시지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열심히 하면 본래의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목표를 갖게 하고, 용기도 줍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가르침은 사람을 참 막막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그러나 제 이야기를 듣고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긴 분들께 저는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그런' 비전이 없어진다고 해서 희망과 용기를 잃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신앙은 도대체 무엇에 기반을 둔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는 진로 고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미명하게 무책임하게 내팽개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혹시 미신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까? 욕심을 추구하면서도, 그랬다가는 하나님께 벌 받을까 봐 미리 확인받고 싶은 욕망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고 그 길에서 돌이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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