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한편으로는 '나쁜 사람들'로 그려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약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원래 좀 과민하고 까칠한 사람들 아니냐"거나, "그래도 내부에서 우직하게 기도하고 바꾸어야지, 승산이 없어 보인다고 쉽게 나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등의 시선이 적지 않다. 신앙의 뿌리가 얕고 믿음이 약해서 시험이 오면 쉽게 흔들리고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는 이들로 폄하된다. 여기서도 이런 문제를 유발한 객관적 상황보다는 그 상황을 맞이하는 개인의 성향을 부각시킨다. 흔히 이런 경우를 '교회 난민들'로 포착하고 이들이 피해자 입장이란 것은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해결책은 "이제 교회로 돌아오라"거나, "이젠 좀 참고, 성질 죽이며 잘해보자"는 식으로 그 개인의 변화를 촉구하는 결론으로 바로 건너간다. 이들을 '잃어버린 양'으로 보는 태도가 전형적이다. 어쩌다가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고생하고 있는데, 이제는 울타리 안으로 다시 돌아와 안식과 평안을 누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이야기는 가나안 성도들에게 즉각적인 반발을 산다. "교회가 그대로인데, 어떻게 다시 돌아가란 것이냐? 내가 잘못한 것이면 회개하고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교회는 전혀 회개하지도 변하지도 않는데, 나만 돌아가면 되는 것인가?" 여전히 인과관계를 오도하면서 책임을 전가하거나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이한 태도는 질타당해 마땅하다. 이 '동정심 어린' 상황 왜곡과 책임 전가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교회의 많은 이들이 원인 규명이나 진실 회복에는 관심이 없고, 이 불편한 갈등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봉합하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한다. 가나안 성도들은 그런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갈등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집단은 똑같은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5 가나안 성도들 가운데서 자신의 신앙을 자가발전할 수 없는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 자체를 포기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속된 준거집단에 의존도가 높은 신앙형태를 갖고 있는 이들은 그런 구조 바깥으로 나와서 오랜 시간 견디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간 성경을 스스로 읽고 깨우치는 법, 개인 기도, 영성훈련, 선교 및 전도의 체험, 일상생활에서 신앙을 적용하고 사는 법 등 자립적 신앙훈련을 받았다면, 소속 집단의 결핍 현상이 곧바로 신앙의 포기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는 역설적으로 선교단체 드으이 신앙훈련을 거친 이들이 가나안 성도가 되어도 생존율이 훨씬 높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124 1990년, 서울에서 대학부를 잘 운영한다는 교회의 학생 대표들 10여 명이 만났다. 각자 교회의 양육 프로그램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선 방안을 찾아보자는 취지였다. (중략) 그 모임이 기본적으로 다루었던 세 가지 핵심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첫째, 각 교회의 양육훈련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어떤 내용을 배우도록 구성되어 있는가? 둘째, 대학부의 자치구조는 어떻게 짜여 있는가? 셋째, 대학부 이후의 삶에 대해 어떻게 준비시키고 있는가?
128 20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벌어졌을까? 단계별 반복학습을 특징으로 하는 양육구조에는 큰 개선이 없어 보인다. 자치회 구조는 큰 폭의 변화를 거친 것 같다. 나는 불과 몇 년 만에 상당히 많은 교회에서 이런 청년부의 자치구조가 와해되고, 임원단이 목회자의 사역을 돕는 간사 제도로 전환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변화이다. 청년들은 다만 교회의 목회적 서비스를 누리는 소비자가 되거나, 프로그램 운영에 자원봉사로 시간과 역량을 '재능기부'하는 준사역자가 되어버렸다. 신앙 공동체의 전진과 후퇴에 대한 논의는 전적으로 목회자의 목회방침에 속한 것이 되었고, 자치회는 목회를 보조하는 실행기구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그 신앙 공동체의 주체가 아니고, 훈련과 양육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의아하게 여기는 비판적 관점은 이제 거의 사라진 것 같다.
135 가나안 성도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단순히 교회 교육의 실패를 드러내는 징표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적인 훈련 패러다임이라고 여겨오던 것마저도 사실상 더 깊은 성장을 가로막고 체제 순응적 인간형을 양산하는 데 머물고 있더라는 뒤늦은 깨달음을 반영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묻는다. "항상 배우나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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