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하나 가지고 싶다고 P는 생각했다. -95쪽
K와 P가 노는 방식이 참 재밌다. 좁아터진 거실에 거대한 별모양 풀을 놓다니. 엉뚱하다.
아내도 풀을 갖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거실 복판에는 절대 두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질색하는 건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집에서도 발뒤꿈치를 살며시 들고 걸어야 하고, 분리수거도 철저히 해야하며, 말할 때도 조금은 숨을 죽여야 한다. 아내가 두고 싶어하는 풀은 따로 있다. 거실에 두는 작은 고무풀 말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왔다갔다하려면 족히 오십 미터는 헤엄쳐야 하는 규모의 진짜 풀. 허무맹랑으로 듣지 않는다. 아내가 원한다면 유럽의 소도시 어딘가로 풀 제작을 위한 준비탐사를 떠날가도 한다. 아내는 지금도 길 가다 기다란 공터만 보면 풀을 떠올린다.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중략) P는 시침을 뗀 얼굴로 자신의 오류를 지적당해 둘이 함께 웃게 될 순간을 기다렸다. -99쪽
K와 P를 보며 우리 부부가 노는 방식과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내도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가 많다. 나는 그 틀리는 게 귀여워 마구 놀려주고, 아내는 내 지적에 씩씩대며 틀린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그 '지적'과 '교정않음' 사이가 우리 부부 대화의 재미 포인트다. 최근 아내는 휘영청 밝은 달을 올려다 보며, "와, 발 닭다" 했고, 나는 그걸 굳이 교정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네 밝네' 하고선, 아내가 이상함을 느낄 때쯤부터 두고두고 놀렸다.
풉풉풉풉풉풉풉풉 근데 이 소리 풉풉풉풉풉풉풉풉풉풉 옆집에 들리지 않을까 -102쪽
우리가 노는 소리는 한편으로 요란하다.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소리도 지르고 욕도 제법 한다. 그렇게 하고서 서로 깔깔댄다. 만약 옆집이 들으면 화내고 싸우다가 웃고 별 이상한 집 다 보겠다할 텐데 이번 집은 다행히 소리를 잘 막아주는 것 같다. 요란한 방귀도 날마다 빠지지 않는다. 방귀는 왜, 뀌기만 하면 웃음이 날까. 유독 방음이 안되던 이전 집에서는 어김없이 웃음을 부르는 방귀 소리가 옆집 사람의 웃음까지 불러 당황하기도 했다(그렇게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불편을 끼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단 하루 거실에 펴놓은 무지개풀로 온갖 생각과 비약에 시달리다가 잠도 설친 채 결국은 그 풀을 접어버리고, 그래도 난 거실에서 물장구 쳐보는 굉장한 경험을 해봤던 사람이야, 라고 말할 P를 생각하니, 온갖 상상의 나래를 잘 펴곤 하는 아내 생각이 나 또 웃음이 난다. 그놈의 풀이 사람 참 힘들게 하네.
- 「무지개풀」,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문학동네 (2008)
'거짓말들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의 바깥」: 인서울 (0) | 2020.03.29 |
---|---|
「너무 한낮의 연애」 : 서툶 (0) | 2016.05.02 |
「파란 책」 : 하이데거를 아시나요? (0) | 2016.04.20 |
「홍로」 : 거짓말 (0) | 2016.04.18 |
「대니」 : 호의 (0) | 2016.03.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