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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 점멸신호 파란불이 깜빡거릴 때, 가기엔 애매하고 굳이 가지 않아도 될 때, 이때 과감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보면 때로는 경이롭다.'그러다 사고 나'라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과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가지 마라 정확하게 말해주는 빨간불 아래서, 확실한 파란불을 기다리며이미 저만치 걸어가는 무모한 사람을 넋 놓고 바라본다. 당최 건너지 못하던 사람은, 신호등이 아무리 오래 깜빡거린다고 해도, 그 길을 절대 건널 수 없다.요즘은 신호등에 친절하게 숫자도 표시되어 상황판단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지만, 속절없이 줄어드는 숫자 앞에 머뭇거릴 뿐, 그래도 못 건넌다.안전한 파란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이다.어려서 '어른이 시키기 전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교육을 철저히 배워온 까닭일 수도 있다. *** 신호.. 2015. 12. 16.
또 들깨 들깨수제비를 먹었다.들깨같은 인간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들깨가 흑임자는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들깨를 먹으면서는 웃을 수도 있으니까.그때는 들깨가 흑임잔 줄 알았다. ㅡ151214 2015. 12. 15.
「그늘의 맛」 : 그늘을 먼저 최근 회사가 다른 회사에 매각되어 지방으로 강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친구의 불평을 SNS를 통해 보았다. 불평 한마디면 될 것을, 그 글에는 대학이며, 군대 이야기며, 전 회사(이미 매각됐으니까) 이름까지, 은근 누설돼 있었다. 나는 이 대학을 나왔고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학교, 그런데 이사와 학교가 무슨 상관?), 군에서 이 계급이었고 (사실 계급이 명시돼 있지는 않았다, 대신 직책을 적어놓는 은밀한 수법. 그런데 또 이사와 군대가 무슨 상관?), 군의 러브콜을 마다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이 회사에 당당히 입사했는데 (굴지의 S그룹. 회사가 매각되었으므로 이미 소속이 바뀌었지만, 현 회사보다는 S그룹 출신이라는 게 훨씬 중요한 듯), 왜 내 인생은 꼬일대로 꼬여,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듣보 회사.. 2015. 12. 15.
알도 아. 조제 알도. 경기 예상 시간 이십오 분 잡고, 지하철에서 내리면 당장 와이파이가 안되니까, 알도 본다고 신도림역 지나칠 각오까지 했었는데ㅡ환승할 때의 그 몇 초도 놓칠 수 없었다. 일 초에도 끝나는 게 스포츠니까. 그런데 정말ㅡ 아성이 무너지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단 십삼 초였다. 계체하는 날을 생각해보면 알도는 무서웠던 것도 같다. 온갖 도발에도 아랑곳 않던 그가, 그날따라 몸을 활짝 펼쳤으니. 외롭지 말라고 무패의 와이드먼도, 극강의 워리어스도 잠시 쉬어가지만, 그게 알도에게 위로가 될 것 같진 않다. 쌓아온 것의 수준이 다르니까. 쉼이 꽤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 한번 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쉬이 잊힐 리가 없다. ㅡ151213, 2호선 지하철에서 2015. 12. 13.
「떠도는 행성 -心經1」 : 별자리 '혼자/고립/홀로'를 억지로 '조화'한다고 해서 그게 '전체/별자리/인연'이 되는가.그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만 조심한다면 어찌어찌 될 것도 같다. 무리 짓되, 여전히 홀로이고 싶은 행성에게는 억지로 그러지 않기로. *** 그건 영원히 혼자였음에도 전체인 듯 살아온 존재들의 운명적 항해였다아니 그렇게라도 믿어올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남긴 통속적인 신화였다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빛으로도 몇억 光年을 달려가야 닿는다는뭇별처럼 아득한 거리에 고립된 채 스스로가 스스로의 유혹이 되어왔고,또 죽음의 함정이었던 검은 블랙 홀. 한때는 행복이었고 지옥이었을마음의 행로를 타고 제각기 비밀에 찬 어둠의 협궤를 떠돌았던 행성들그렇듯 홀로 공전하며 타오르다가 드디어 폭발해갔던 소우주였다하루에도 천 번이고 수축하고 팽.. 2015. 12. 11.
「세상 속으로」 : 人事 사람 냄새 나는 단어들.'病/근심/자주 흰 걸레를 더럽혀야 하는 마룻바닥/퇴근길의 수박/세금/청소차가 오지 않은 골목/진흙의 옷을 입은 사람들/못 만날 약속/집/사람' 나도 이제는,더러운 골목을 다니며 더러운 옷 입은 病든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못 만날 약속을 하고, 집에 돌아가 더러운 마룻바닥에 누워, 수박 하나를 입에 물고, 당장 세금 낼 근심에 잠기고 싶다. 오랫동안 산정에 있었다. *** 나는 오랫동안 풀꽃의 생애를 노래해왔다그러나 이제는 人事에 대해서 노래하련다이제 내 몸이 바라는 곳, 눕고 싶은 곳은산이 아니라 물이 아니라病이 있고 근심이 있고 자주 흰 걸레를 더럽혀야 하는마룻바닥이 있는 집여름에는 퇴근길에 수박을 사고월말에는 세금을 내러 은행에 가는 마을 이제 나는 이념에 물들지 않은 .. 2015. 12. 10.
<시카리오> 1. 시계의 작동원리를 묻지 말고, 일단 시곗바늘 움직이는 걸 지켜보기만 하라는. 역시 정보가 계급이다. 2. 임명된 사람들이 아니라, 선출된 사람들로부터 그려져 내려온 그림. 3. 국경이 주는 본연의 두려움. 4. 죽고 죽이는 일에도, 선과 악이 있는지. 5. 축구 시합 중의 기관총소리. 담담한 사람들. 다시 플레이볼. ㅡ, 151205 2015. 12. 8.
별꼴이야 다른 셀의 시끌벅적함이 어색해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는 말이 미안하고, 또래모임보다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는 말이 고맙다. 나는 최대한 들어주고 싶었고, 말을 계속 하고 싶게끔 묻고 싶었고, 무엇보다, 따뜻하고 싶었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ㅡ151206 별꼴이야, 서로를 관찰하는 시간 2015. 12. 8.
「이탈한 자가 문득」 : 궤도 나는 안다. 내가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싶어한다는 걸. 태양도 뭇별도 그렇게 한다는데 궤도가 꼭 나쁜 건 아니지 않은가고 스스로를 설득하지만 (부루마블에서 한바퀴 돌 때를 생각해봐), 그래도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아는 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그 궤도에 대한 미련을 포기할 때, 비로소 한 번이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그을 수 있나. 지금껏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궤도 안에서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그거 한번 긋고 싶다. (훗날 생길지도 모르는) 처자식 굶기지는 않는 선에서. 그래도,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분들에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 2015. 1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