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남에게 상자를 덮어씌울 때는 별생각이 없지만 내가 남들이 씌운 특정한 상자에 갇히고 나면 그제야 답답하고 부당하다는 생각까지 든다는 점이다. (중략)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중받을 때 배려받는다고 느낀다면 나부터 타인을 그렇게 대하면 될 일이다. -23쪽
부모와 자식은 분리되어야 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다. 분리되지 못한 대가를 오랜 시간 치른 후에야 그것을 알게 됐다. 이제 내가 엄마다. 아들이 발달장애인이다. 아들과 내가 분리되지 않았을 때 아들의 장애는 아들 인생의 장애이자 내 인생의 장애물, 우리 가족의 장벽이었다. 장애는 단지 장애일 뿐이라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25쪽
인간의 삶은 비장애인으로 태어나 장애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27쪽
사랑도 그렇고 배려도 그렇다.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아들이는 마음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29쪽
아이들이 어릴 때 남편은 퇴근하면서 전화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곤 했다. 온종일 쌍둥이 독박육아에 지친 아내를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내가 간다고. (중략) 곰돌이 푸가 그랬다.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고. 인생에서의 보석은 티파니 매장 앞이 아니라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 속에 박혀 있었다. 그 보석을 찾기로 마음먹고 끝내 발견해 내는 것, 그것이 자신을 배려하는 방법 중 하나임을 이제는 안다. -35쪽
"괜찮아, 널 친구로 인정해 줄게"라는 비장애인의 선심 (중략) 우리는 낯선 타인에게 친구라 하지 않는다. 생전 처음 보는 저 아저씨와 나는 친구가 아니다. 스쳐 지나는 타인이고 관계를 맺어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 자연스럽게 맺으면 된다. 반면에 장애인에겐 굳이 '우리가 친구'라는 점을 강조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 그 다름을 퇴색시키기 위해 친밀함을 나타내는 '친구'라는 단어까지 끌어 와 만든 말, 그게 장애우다. -41쪽
장애인을 배려하는 의도에서 사용되는 잘못된 표현이 또 있다. '장애'라는 말을 꺼내는 게 왠지 미안해서 '아프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중략) 장애는 아픈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애인을 배려하는 마음에 아프다고 표현한다. 아픈 환자로 바라보는 마음엔 장애를 나아서 없애야 할 질병으로 바라보는 '장애 혐오'의 시각이 숨어 있다. 장애를 비정상적인 상태로 판단하고 정상이 되길 바란다는 마음이 녹아 있다. -43쪽
나는 어떤 인간이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떠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스펙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온전한 알맹이로 마주했을 때 나는 어떤 개인일 수 있는가? -45쪽
괴롭고 슬픈 일은 여전히 일어난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괴로움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고 슬픔과 나도 동의어가 아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더 배려하게 된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으로 내 삶을 배려한다. -47쪽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그저 믿고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뿐이다. 삶은 자신의 선택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없고 후회가 있더라도 스스로 한 선택이기에 기꺼이 책임질 수 있다. -49쪽
시스템에 익숙해져 버린 상태로는 시스템을 볼 수 없다. 매트릭스 안에서는 매트릭스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구조화의 시각으로 보아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구조를 볼 줄 알아야 개인에 대한 비난을 멈출 수 있다. 네 탓이 아니라고 다독일 수 있다. 각자의 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 -55쪽
부부는 평생 공놀이를 하는 관계다. 출산이라는 현실 과제를 앞에 두고 아내가 먼저 남편에게 배려의 공을 던졌다. 남편은 자신이 받은 공을 어떻게 돌려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혹여나 '집에서 놀면서'라며 쓰레기를 돌려주려 준비 중인 남편이 있다면 윌리엄 골딩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더 크게 돌려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57쪽
충고라는 행위는 순식간에 관계를 구조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충고하는 나는 너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네 위에 선 자다. 우리는 동등하지 않다.' 순식간에 상대를 내 밑으로 밀어 넣고 상하 관계, 즉 구조화의 틀을 작동시킨다. (중략) '충조평판' (충고, 조언, 평가, 판단)보단 경청! 그것이 타인을 배려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61쪽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느껴진다는 것은 아이의 내면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 선생님은 아이의 수업 태도와 시험 점수가 아닌 개개인의 존재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각각의 존재를 존중하며 그 속에서 특별함을 찾으려 했다는 말이다. -69쪽
"너는 잘못 태어난 존재가 아니야. 사랑의 결실이야.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중략) 존재를 감싸 안는 말보다 더 큰 배려의 말을 없는 법이다. -71쪽
차별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멈춰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기도 하다. 차별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는 상황에 따라 내가 다음번 차별의 대상이 된다. 졸업한 학교에 따라, 사는 동네에 따라, 연봉에 따라, 외모나 나이에 따라 우리는 차별하는 준거집단에 속하기도 하지만 차별받는 아웃사이더가 되기도 한다. -73쪽
역사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특별한 누군가만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그 역사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81쪽
노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외부 세계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하는 일이 늘어 간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신체 노화가 노인을 인증하는 게 아니라 입에 지퍼를 채우도록 강요받는 암묵적 외부 공기가 노인을 늙게 만들고 있는지도. 상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도 배려다. 사랑하는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우리는 이토록 인색해졌을까. 어쩌다 젊은이의 오만함을 나이든 부모 앞에서 내세우게 되었을까. 지금 내 부모의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일 텐데 말이다. -91쪽
권력 가진 자의 입에서 "싫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구조의 하층부에 있는 장애 학생은 '싫다는 말을 들어도 되는 존재'로 대상화되어 버린다. (중략) 싫은 사람에게 싫다고 말하는 건 자유지만 자유를 행하며 하는 말이 상황과 관계를 어떻게 구조화시키는지 알았으면 좋겠다고. -93쪽
'나는 할머니의 보물이다. 그런 나는,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다시 반짝여야 한다. 이대로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서 나머지 삶을 버리듯 없는 듯 살아 버리면 안 된다.' -95쪽
왜 페미니즘을 공부하려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이가 오십을 바라보니 이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없더라고. 어느덧 나는 갑의 위치가 돼 있더라고. 하지만 내가 관계 맺고 일하는 사람들은 상대적 을의 위치에 있다고. 갑질하지 않기 위해, 몰라서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여성 인권이자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기도 한 페미니즘을 공부하려 한다고. 내가 아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알고자 한다고. -105쪽
"개소리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야." (중략) 사람은 누구나 말실수를 한다. 세상의 모든 개와 반려인에겐 미안하지만 지인의 입을 빌려 이럴 때의 말실수를, 그 '느낌적 느낌'을 살리기 위해 잠깐만 '개소리'로 지칭한다. 개소리는 모두가 한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 개소리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개소리나 일삼는 개놈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개소리를 한 그'는 '그'라는 인간 전체의 극히 일부지만, 우리는 개소리를 한 번 들으면 그것에만 꽂혀 상대의 존재 전체를 개놈으로 규정한다. "개소리를 했으니 너는 개놈이야!"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 형상을 그린다. -111쪽
보호자가 아닌 동행인이 되어야겠구나, 그것이 아들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배려의 말이겠구나 -123쪽
배려한 게 아니라 배제한 것이다. 소수를 배제하는 것으로 다수의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익숙한 형태의 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129쪽
구조적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중요하다. 내게 당연한 것이 모두에게 당연하지는 않다. 나를 둘러싼 여러 환경 요소 덕에 어떤 부분에서는 특혜를 받으며 살았고 현재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133쪽
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무조건적인 도움과 배려가 아니다.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특별한 필요'에는 도움이 아닌 지원을 하면 된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오히려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다. 장애인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정작 그 기회를 뺏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135쪽
의사와 장애인의 활동을 돕는 치료사가 어떤 장애인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당사자는 '장애인'이 되기도 하고 단지 장애가 있을 뿐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중략) 장애인을 볼 때 '장애'가 아닌 '인'을 먼저 보려 노력한다 -139쪽
무라카미 류의 방법!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멈추지 않는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후진 세상에 대한 복수라며 인생을 마치 축제처럼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 -147쪽
우리 엄마도 그랬다.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자르라"고. '여자' 대신 '남자'가 들어가는 게 더 자연스러운 문장을 엄마는 항상 '여자'로 바꿔 이야기했다. -169쪽
살다 보니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사람이 더 위험했다. 주변을 배려하는 이는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중략) 책임감과 주인의식으로 위장한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 속에는 욕심과 오만이 숨어 있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 그래야 오만해지지 않는다. 그래야 변질되지 않는다. 그래야 '내 중심'이 되지 않는다. '내 중심'을 탈피해야 주변도 배려할 수 있는 법이다. -175쪽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배려의 언어를 찾지 못했다면 차라리 그 앞에서 침묵하는 게 낫다. 침묵하면 적어도 상처는 주지 않는다. -185쪽
우리 자신의 현재 모습은, 각자가 처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최적의 모습일 것이다. 미워서 꼴 보기 싫은 누군가도, 예뻐 죽겠는 아들도, 모두 살기 위해 그리되었다 생각하면 모든 걸 쉽게 단정 짓지 않게 된다. 살기 위한 발버둥으로 이해하면 그의 상황까지도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지도 살려고 그런 거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191쪽
장애는 우울하고 심각할 일이 아니며 미안할 일도 아니다. 얼마든지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인의 상태다. 장애가 이렇게 단지 캐릭터가 될 때, 장애인과 장애 아이 부모와 우리 모두가 이렇게 생각할 때가 비로소 우리 모두 장애 혐오에서 자유로워지는 때일 것이다. -203쪽
엄마로부터 풀려난 아들은 뛰듯 걷듯 지하철 안을 돌아다녔고 난 아들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들의 움직임에 따라 지하철 안 모든 시선이 함께 움직였다. 5분이었다. 아들이 더 이상 시선을 받지 않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 5분 후 아들은 지하철 안의 당연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 큰소리로 통화하는 아줌마 그리고 "우이 우이"하며 즐거워하는 발달장애 어린이가 모두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209쪽
'[밑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로 서지 않기로 했다』, 조수희, 목수책방 (2019) (0) | 2020.05.19 |
---|---|
『습관의 말들』, 김은경, 유유 (2020) (0) | 2020.04.27 |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등, 민음사 (2020) (0) | 2020.04.27 |
『읽기의말들』, 박총, 유유 (2017) (0) | 2020.04.27 |
『9번의 일』, 김혜진, 한겨레출판 (2020) (0) | 2020.04.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