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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아이들은 미숙한 게 아니라 예민할 뿐이고, 어른들의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일 뿐이다." - 7쪽
나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틈틈이 관찰한다. 야쿠르트 아줌마, 버스 운전기사, 학원 가는 아이를 보면서 저이는 어떠한 삶의 사정과 행로를 거쳐 지금 여기에 있을까 상상한다. 한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무작정 혐오하기는 어렵다. 누구라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서로 아무런 삶의 연결고리가 없을 때 더 쉽게 혐오하지만, 서로의 삶이 한 자락이라도 섞이면 이해하고 공감할 여지는 꼭 생긴다. -9쪽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19쪽
엄마가 쓴 자식 양육서를 읽느니 딸이 쓴 엄마 이야기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24쪽
스스로 좋은 엄마라고 착각하지 않는 엄마 되기, 아이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을 수시로 그려보기. 그저 고양이처럼 말없이 아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25쪽
비 오는 날도 해 뜨는 날도 그냥 날씨인데 인간의 관점에서 좋은 날씨 궂은 날씨 구별하는 것이라는 스피노자의 말대로, 삶의 어떤 국면을 좋음과 나쁨으로 가르는 것도 지극히 관습적이고 현재중심적인 판단이라고 느꼈다. -29쪽
세상에는 이미 너무 많은 글과 논리가 있고 지식이 있다. 그것에 묻힌 너무 작은 목소리가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살리는 일을 내심 과업으로 삼았다. 저자의 일침대로라면 육성만 담지 말고 울림과 떨림까지 담아야 하고 그것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저항"으로 가능하다. -34쪽
'헤어진 부모'에 관한 글을 접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부부 싸움이 시작되는 전조를 감지하는 초조, 쟤만 없으면 당신이랑 안 산다는 말에 덴 자국, 아빤 외국에 갔다는 엄마의 세뇌, 아빠의 재혼 소식을 엄마에게 전하며 울던 기억,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너도 아빠 없니? 나도 따로 살아"라고 말해 비밀 친구가 된 일화, 조손 가정이라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죽기로 공부에 매달렸다는 고백. -41쪽
아이들에게 이혼은 어느 날 부모 한 명이 증발하는 일이고, 남은 부모의 안색을 살피는 고도의 정신노동이 부과되는 삶이며, '너라도 잘 커야'하는 장기 채무가 발생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어떤 고통도 주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옆에서 생생한 아픔을 겪는 한 존재가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애들은 몰라도 되는 어른 문제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41쪽
한부모 가정 아이는 불행하다기보다 예민하다. 그 예민함의 촉수로 무니가 타인의 슬픔을 포착하듯, 또 다른 무니들이 삶의 무수한 장면을 읽어내고 속 깊은 글을 써내는 걸 나는 본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혼은, 한부모 가정은, 누구의 무엇을 언제를 기준으로 결핍이고 약점인 것이냐고. -42쪽
좀 합리적이 되라고 말하는 변호사, 네 병은 내가 안다고 말하는 의사. 알려주지 않으면 하나도 모르고, 알려주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그들은 이 시대의 '전문가'들이다.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기 위해 진득한 노력을 기울이는 인내심이 부족하고,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자기 지식으로 성급히 단수노하하는 재주만 능하다. -46쪽
실상은 목소리 없는 자를 좀처럼 못 견디고, 논리적 전개가 아니면 상황 이해에 서툴고, 원활한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되면 구성원을 제쳐두기도 하는 사람이 나였다. 우선은 불안과 조급 없이 목소리 없는 이들과 '그냥 있는' 연습부터 해야 했던 것이다. -47쪽
여성의 공적 말하기 기회가 드물기에, 여성의 말하기를 듣는 기회도 없다면 '그냥' 듣고 있는 게 남성으로선 어렵고 어색한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평생의 억울함을 터놓는데 잠시의 억울함도 견디지 못하고 끼어드는 말은 제 스스로 힘을 잃는다. -50쪽
"엄마가 여상을 다녔던 때와 지금은 현실이 달라. 너 특성화고 나와서 취직하면 여자고 고졸이고 약자 중에 약자야. 조직에서 어떤 대접받는 줄 알아? 네 꿈과 재능을 펼칠 수 있을 거 같아?"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인지는, 소설 속 모녀의 대화 장면을 보고 깨달았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너희가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나도 안 했다. 내 자식만 감싸고돌면서 '지금 세상이 어떤 줄 아느냐'고 하면서 그 세상을 고착시켰다. 일찍 돈을 벌어야해서든, 빨리 기술을 배워 사회에 진출하고 싶어서든, 누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아이들이 안전과 존엄을 보장받는 사회를 만드는 게 어른이자 부모의 도리인데 얌체같이 내 아이만 무사하길 바랐다. -71쪽
이 세상에는 온통 '이렇게 키워라, 저렇게 해줘라' '좋은 엄마라면 명심하라'라는 소위 전문가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떠다니는데, 그것은 개개인의 구체적인 처지를 감안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육아 지침은 그 자체로는 온당한 말이지만, 엄마가 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지침이다. -76쪽
자신이 용감해지는 자리를 알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대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럽지만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 (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83쪽
사랑은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치 않다는 점에서 쉽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그러니 사랑을 얼마나 해보았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보았느냐. 왜 사랑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비활성화된 자아의 활성화가 암울한 현실에 숨구멍을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91쪽
'노키즈존'이라는 말을 보고 철렁했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며 식당이나 카페에서 아이들 출입을 금한다는데 그 논리가 옹색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면서 어른이 됐다. 여전히 힘 있는 어른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의 시공간을 임의로 강탈하면서 자기를 유지한다. 왜 아이들을 대상으로만 권리를 주장하는 걸까? (중략)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100쪽
전국으로 간담회를 다니는 세희 아버지 임종호 씨는 "우리 자식 물에 빠져죽지 않게 수영 가르쳤다"는 학부모들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깝다. "개인이 노력해서 수영 잘해서 될 게 아니잖아. 왜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지 말하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자식 일이라고 생각 안 해요. 소를 잃어본 사람이 외양간을 고치지, 소가 멀쩡하게 있는 사람은 모르더라고." -119쪽
'가난한데 대학원을 왜 굳이 가려고 할까?'했다가 저자처럼 공부가 너무 재밌고 평생 하고 싶은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공부할까를 묻게 됐다. '학자금 대출받지 말고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라고 쉽게들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저자는 각 장학금마다 요구하는 '인재'상에 맞춰 "가난소개서"를 써야한다며 "장학금을 받기 위해 자신의 가난을 강제적으로 발화하게 하는 것은 특정 계층에 대한 낙인화이자 폭력"이라고 말한다. (중략)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가 부끄러운 것이다" -124쪽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 아마 그건 고생 끝에 낙이 온 사람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거다. 그들은 자서전으로, 인터뷰로 자기 말을 퍼뜨리지만 "성실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실했다가 개죽음을 당한" 이들은 말이 없다. 특정 지역이 사교육 시키기 좋다는 말. 사교육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기득권층이 된 이들의 언어일 것이다. 사교육에 실패했거나 애초에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이들의 말을 배제됐다. 재개발이 지역 발전에 좋다는 말도 마찬가지. 매매차익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과 그것을 조장한 토건재벌의 말이다. 쫓겨난 원주민의 말은 무음 처리다. 사회적 편견은 그렇게 생산 및 유통된다. -125쪽
매일 일정한 시각에 아내가 사라지는 것을 안 남편은? 사설 탐정을 시켜 찾아낸다. 수전은 세상에 의해 발각된다.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나 6시까지 19호실에서 혼자 있다가 간다고 호텔 지배인이 '있는 그대로' 증언했지만 남편은 믿지 않는다. 다른 남자와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자신에게 애인이 있었듯이 당신도 그랬을 거라며 교양과 관용의 제스처를 취한다. -130쪽
아들들이 학창 시절 이런저런 불편을 겪는다 한들 딸들처럼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다. 화장실 갈 때나 택시 탈 때마다 불안에 떨면서 평생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꽃처럼 예쁘단 말은 그 자체로는 덕담 같지만 한 사람이 꽃이 되는 순간, 발화자가 언제든지 꺾어버릴 수 있는 수동적 존재가 되고, 꾸밈노동을 강요받는다. -133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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