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필자가 만난,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이른바 에코 세대 (베이비부머의 자녀)에게 가장 흔한 심리적 난감함은 다른 것이다. 그들 중 특히 젊은 남성에게서 엿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삶의 중요한 가능성조차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본 뒤 끝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정을 겪어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험의 가치를 도외시하는 것 같다. 오로지 결과를 염두에 둘 뿐이다. 그리고 시뮬레이션의 결과에 대한 반응은 항상 "그래서 뭐? 그래봤자 별 거 없네"라는 식이다. 머릿속으로만 따질 뿐 경험하지 않으려는 세대, 몸을 움직일 생각은 않고 머리만 굴려 쓸데없는 것을 구별해내려는 헛똑똑이, 결국 돈 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안일함,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뮬레이션. 그것이 핵심문제가 아닐까 싶다.
17 그(안철수)처럼 살 생각은 없으면서 그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 ... 그들은 멘토가 성공하기 위해 직접 경험한 것은 염두에 두지 않을뿐더러 그처럼 살아볼 엄두도 내지 않는다. 다만 그 성공을 부러워할 따름이다. 사회 저명인사는 그들의 꿈이 가능함을 그들 '대신' '이미' 보여준 증거이며, 그들의 시뮬레이션은 멘토를 통해 완성된다. 시뮬레이션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면 멘토가 굳이 없어도 될지도 모른다. 이미 자기만의 경험의 세계로 뛰어들었을 테니 말이다. 자기 인생에 책임을 다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얻고자 악착같이, 의심 없이 끝까지 부딪쳐 보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얻어내는 것은 시뮬레이션으로는 결코 느끼지 못한다. 그런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린 안다. 왜 많은 젊은이들은 시뮬레이션의 세상에 갇혀 있을까?
19 공부는 잘했는데 취직을 못 하거나, 돈을 제대로 못 번다면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 없다. 정작 부모는 자녀가 건강하게 균형 잡힌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돈 잘 벌고 안정적인 돈벌이를 하는 유능한 사회인이 되는 데 관심이 있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부모의 속마음은 그렇다.
19 배고프게 자란 부모세대에게 잘사는 것만이 그들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그들에게 잘산다는 것은 문화도 배려도 나눔도 없이 그저 혼자, 내 가족만 잘 먹고 잘사는 '앙상한' 경제적인 풍요를 의미했다. 그러니 그들의 아이들 역시 자신들이 잘살기 전까지는 그 지독한 인정 욕구를 충족할 수 없을 것이다.
21 'Yes, but......' 게임 (시뮬레이션으로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모두를 좌절시키는 게임) ... 학생은 그렇게 여행을 미루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상담사가 뭔가를 제안하면 "네, 좋은데요, 근데 이런 문제가 있어요"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세상 모르는 것 없어 보이는데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상담사의 어떤 제안도 이 젊은이의 2차원적 시뮬레이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결국 그날 상담은 상담사는 물론이고, 학생 본인도 좌절해 "보세요, 저는 이렇게 구제불능이라구요" 하는 메시지만 확인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22 생각 같아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무언가 하려고 들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무기력함과 두려움이 앞섰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자신이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자신만의 가치나 생각이 무엇인지 자문해봐도 막상 그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대부분의 순간에 부모의 의견을 따랐고, 기껏 반항을 한다고 해도 대단치 않았다. 부모의 뜻을 어긴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고민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에겐 자신을 탐색할 수 있는 틀도, 언어도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찾는 방법조차 모를뿐더러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무엇을 욕망할 것이냐는 사실 그 다음 문제였다. 그 학생은 또래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성취와 성공을 강하게 열망했지만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늘 회의하고 불안해했다. 목표를 위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노력해야 하고, 가만히 있으면 도태될 것 같아 뭐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 마음만 늘 부대낀다. 무엇보다 문제는, 자신의 이상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크다는 것이었다. 그 간격은 일상에서 늘 긴장을 불러왔다. 남들 눈에 멋있게 보이고 싶지만 자신을 돌아보면 초라하기만 하고, 그런 모습을 들킬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다보면 너무 지치고 사람 만나는 일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서 포르노나 게임 같은 자극적인 대상에 강박적으로 몰입하게 됐다고 한다. 과도한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중독에 빠지는 것이다. 모두 현실을 회피하거나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면서도 뭔가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런 두려움이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다시 불안해진다고 했다. 그렇게 그 남학생은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에 옮기지는 않고 머릿속으로만 상황을 저울질하고 결과를 예측하다가 조금이라도 어려울 것 같으면 다시 포기하기를 반복하곤 했다.
24 과연 인간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경험해보는 것이다. 그 경험을 지식으로 갈무리함으로써 경험과 지식을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과정이 성장인 셈이다. 그런데 시뮬레이션에 갇힌 이들의 세계는 실수나 예외를 가능한 배제한다. 예상 가능한 결론 그리고 인풋과 아웃풋이 명확하게 드러난 대차대조표에 의해 움직인다. 그들은 어떤 이득이나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시도하거나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
25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자기 인생을 시작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20대는 그럴 기회조차 박탈되어버린 이들이 부모가 만들어놓은 틀에 안주하려 들기에 안타깝다.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결정권을 갖지 못한 채 삶을 유예하도록 강요받는 20대는 삶을 시뮬레이션할 뿐 시작은 못하고 있다.
57 모든 가능성이 열린 상황에서조차 자발적으로 움직이려 들지 않고, 무엇에 기여해야 하고 누구와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지 고민하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점이 두드러졌다. 모임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그룹 내의 누군가가 어떤 의견을 올려도 그것이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이득이 되거나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아예 '생까고' '냉무'로 일관한다. 그들의 태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효율성'을 기본원칙으로 삼아 최대한 '수동적인' 포지션에서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매뉴얼'에 입각해 행동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태도가 문제가 되어 선배들이 몇 가지 문제 제기를 하자, 그들은 한결같이 선배들이 틀을 더 잘 짜서 자신들에게 이런 저런 지침을 내려주었더라면 모임이 더 잘 되었을 것이다, 정확하게 요구하고 가르쳐줬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며 불평으로 일관했다.
61 20대 중반까지의 삶은 아주 확고하게 정해져 있어 모두가 대학에 '올인'하게 됐다. 젊은 소설가 김애란은 그 상호아을 이렇게 재치있게 묘사했다. "내 꿈은? 대학생, 네 꿈은? 대학생, 우리의 목표는? 대학교 가기, 대학생이랑 '존나' 비슷한 대학생 되기" 아이들은 공부 외에는, 점수를 위한 것 외에는 해본 것도 없고, 꼭 필요한 일 외의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영양가 없는 일'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67 인간의 조화로운 성장을 위해 중요한 것은 몸으로 경험하는 것, 오감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정해진 답을 맞히거나 아는 것을 반복해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기를 써보는 경험이다. 이런 경험의 결핍이 결국 '시뮬레이션'으로 모든 것을 감수하는 세대를 양산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교육, 사교육에 예술과 취미를 위한 온갖 교육까지 받고 어학 실력과 자격증을 갖췄지만, 정작 삶을 살아가는 데는 요령부득인 헛똑똑이가 되었다. 멋지게 경력을 쌓으며 누구보다 유능한 사람이 되길 원하지만, 정작 삶의 중요한 국면에선 허방만 짚는다. 그 어느 세대보다 세련된 문화적 취향과 취미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삶이라는 복병 앞에서는 무력함을 느끼며 늘 '매뉴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매뉴얼일까?
68 <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 장그래가 직관과 자기만의 촉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바둑 연수생이었던 그에게는 자기만의 수가 있고, 다른 사람의 수를 읽는 눈이 있고, 중요할 때 승부수를 거는 패기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게 배우겠다는 의지가 있다. 물론 이상화된 주인공임이 분명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한번쯤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싶다.
71 고통 없는 삶은 삶 그 자체에 대한 거부와 다름없다. 고통을 '겪어내는' 과정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어떻게 그 고통을 마음에 품어 변화와 변형을 이끌어낼 것인가? 결국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삶이라는 것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언인가 하는 의문과 씨름하는 것,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115 여전히 자신들의 부모세대와 마찬가지로 '잉여=실패'라는 공식으로 자신의 삶을 몰아세우는 20,30대도 많다. 늘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요즘 젊은이에게 '놀고 먹는 시간'은 '잉여'로 다가온다. 성취해야 할 목표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이렇다 내세울 만한 일도 못한 채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다... 그들의 삶 역시 '잉여'와 '잉여가 아닌 것'으로 나뉜다. 그 기준은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아웃풋을 창출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다.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면 '잉여짓'으로 치부한다. 휴식마저도 '잉여'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제대로 놀 줄도, 쉴 줄도 모른다. 피곤하다.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멘붕'을 토로하는 이유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낙오에 대한 두려움은 휴식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다 뒤처지면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잉여'의 잣대는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에 따라 사람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는 어렵고 피곤한 인간관계를 만드느니 혼자 밥 먹고 혼자 노는 것이 낫다. 주어진 시간에 아무런 아웃풋도 창출해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고립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131 자신에겐 아무렇지도 않았던 어느 봄날이 어떤 사람에겐 돌이킬 수 ㅇ벗는 하루로 기억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138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에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그만큼 구속도 컸다. 희수 씨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국문학과에 진학한 것은 그 시작이었다. 부모가 만류하는 직업을 갖고, 부모가 반대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희수 씨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의문스럽다. 지각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며 아이들을 깨우는 자신을 보며, 지각 결석 조퇴는 절대로 안 된다던 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얼마나 닮았는지 생각한다.
140 자신이 성장 과정에서 겪은,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고통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아이들만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도록 노력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희수씨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크다. 희수씨나 남편은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것을 싫어한다. 아이와 소통하는 부모이며 억압적이지 않은 부모라고 생각한다. 희수씨나 남편은 이른바 '배운 부모'답게 자녀에게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싶고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배운 부모'라는 가면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자신들이 정한 경계와 틀 안에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고, 그 경계와 틀은 잘 드러내지 않는 대신 그만큼 더 완고하고 치밀할지도 모른다.
163 노후를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제 자식에게 부양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가 되어 나이들수록 자식보다 돈이 더 절실하다고 한다. 부모를 돌보는 것도 자기 세대가 마지막이라고 명호 씨는 생각한다. 자기 복은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도 다 옛말이다. 이젠 자식 있는 게 복이 아니라 자식 때문에 노후 준비도 못해서 이래저래 힘들다니 말이다. 학비는 물론 결혼해서 살 집까지 보태줘야 부모 노릇 기본은 하는 거란다. 그거라도 제대로 못해줄 것 같아 미안하지만 자식 때문에 노후 준비를 못하니 자식이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169 현실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버지와 나눈 추억이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바빴다. 기억 나는 일은 대체로 어머니를 통해 들은 아버지의 근황 정도였다. 아버지와의 접촉은 언제나 은근한 불편감을 감수해야만 했기에 가능하면 그런 시간은 피하고자 했고, 함께 하더라도 대화라고 할 수 없는 최소한의 말만 나누었을 뿐이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그는 아버지를 애도할 기억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낙담했다.
182 새롭게 들어선 길과 건물은 필자의 방향감과 소재감을 포함하여 공간지각력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버렸다. 한국으로 돌아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경산에 내려가면 길을 잘 잃는다. 어떤 지점에 가서는 지남력마저 상실해버린다. 그렇게 허공을 딛고 선 듯 방향감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머릿속으로는 '전에 이 자리께에는 친구 아버지가 하던 한약방이 있지 않았나' 이런 하릴없는 생각을 한다... '아, 나는 이 새로운 도시를 인정하지 않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 이 도시는 1970년대의 기억과 연결된 그 경산이 아니다. 필자는 여전히 과거의 경산이라는 공간에 붙들려 있었다.
184 마음 둘 곳은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되었다... 변화는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최소한 인간을 계속된 긴장 상태에 머물게 한다. 그 두려움과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을 놓지 않으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 안정적인 시간과 공간은 반드시 지금, 여기에 현재하는 것이 아니어도 된다. 그것은 정신세계 속에 있는 시간과 공간 또는 대상이어도 된다. 그러므로 40년 전 어디라도 괜찮다. 변하지 않는 그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면, 그 모조품이라도 괜찮다... 1970년대를 복원하기 위해 퇴행을 감행...
224 IMF 이후 '말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가속화된 것 같다고 했다. 말의 표현이 너무 세지고 실제와 동떨어지거나 과장된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아무리 농담이라짐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향해 '사악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에 기겁했다고 말했다. 하긴 "고객님! 사랑합니다"라며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야만 하는 사회라면 이미 말의 질서가 무너진 것은 분명했다. 아니, 말의 질서 이전에 삶의 질서가 먼저 무너진 것이다.
227 예전에 사람들은 가난을 불편하거나 힘든 것이라고는 했어도 적어도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가난은 개인의 무능력과 무지로 이해되고, 가난하면 결혼하지 말라거나 아이를 낳지 말라는 식의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리 가난하거나 쪼들리는 살림살이가 아닌데도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다. 불안과 함께 날선 적대감이 우릴 더 고립으로 이끈다... 우린 언제부터 이렇게 불행해진 것일까? 우리가 좋았던 시절이라 회상하던 그 가난하던 때는 뒤로 물러갔고, 사실 그 언제보다 우리 사회는 풍요로워졌는데 우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궁핍하고, 우린 가장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
229 이제 우리는 시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어글리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 살고 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과 사회는 완전히 '경제화' 되어버렸다. 시장 경제 논리에 완전히 포섭된 채 경제적인 가치 외에 우리가 아는, 지켜야 할 가치는 남아 있지 않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시장이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을 시장의 요구에 맞춰 만들어내는 곳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젊은이들은 자본이 지배하는 미로 같은 세상에 갇혀 오로지 정규직과 명품만이 자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가 무너지고 있다.
252 흐르는 물은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다. 모래와 자갈과 낙엽과 바위는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보듬고 부딪치고 춤추고 감싸며 그렇게 흐르면 되니 말이다. 우리도 그렇게 흐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에겐 영혼의 힘이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흐르는 것은 운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진보이며 정의다. 보수가 '이대로'를 원한다면 진보는 '앞으로' 가야 한다. 수구가 정체를 원한다면, 정의는 흘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은 스스로를 정화한 정의이며, 이것이야말로 고여 썩는 악에 물들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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