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어떤 경우, 화해는 나쁘다. 첫째, 화해할 이유가 없는 사이끼리 강요된 화해는 나쁘다. 화해를 무조건 좋게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학교에서는 종종 폭력 사건이 발생한다. 둘이 대등한 상태에서 주먹을 주고받은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한쪽이 상대방을 묵사발을 만들기도 한다. 맞은 아이는 코뼈가 내려앉고 이가 부러진다. 아이들 세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라고 해서 장난의 연장으로 보면 곤란하다. 정말 피가 튄다. 어른 사회에서 이 정도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이 출동하고 소송이 걸리고 난리도 아닐 텐데, 하굑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해결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멋진 충고를 곁들여 결말이 나기도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나란히 같은 학교에 다닌다. 정말 화해가 이루어진 것일까? 평화가 찾아왔을까? 이들은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더 친한 사이가 될까? 당신이라면 별 시답지도 않은 이유로 주먹을 휘둘러 당신의 코뼈를 내려앉히고 이빨 몇 개를 부러뜨린 그 자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겠는가? 설사 그에 따른 위자료를 충분히 받았다 치더라도, 정말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는가?
20 어른 사회에서도 화해의 강요는 나타난다. 예를 들어 직장 내 성희롱으로 상사를 고발한 여직원은 여지없이 화해의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나쁜 짓을 한 것은 알지만 앞으로도 얼굴 맞대고 지내야하는 직장 상사이니 너그럽게 이해하고 화해하라고 한다. 가해자는 사과를 했다. 피해자는 어쩔 수 없이 이해하고 화해한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좋게 넘어가자고 화해를 종용하던 주변 사람들은 다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피해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과하면 다 해결되는가? 이것은 정말 화해일까?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그것도 용인할 수 없는 수준의 잘못으로 상처를 받았을 때 자신의 편에 서서 정의를 부르짖어 주지 않은 직장 동료들에 대한 실망,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좌절, 게다가 '알고 보니 독한 여자'라는 주변의 곱지 못한 시선... 그는 이중으로 상처받는다. 섣부른 화해가 가져오는 부작용이다. 화해를 통해 오히려 가해자는 당당해진다. 이미 그는 용서를 받았으니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네가 덤벼 봤자 그 정도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면 또 다른 누군가를 피해자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26 어른이 되고 교사가 된 나는 학생들의 거짓말에 웬만하면 다 속아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아니, 속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는다. 학생들에게도 대놓고 말한다. 나는 너희들이 하는 말 원칙적으로 다 믿는다, 하고. 왜냐하면 내가 공연히 모자라는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적발해 내면서 살다가 그 중 단 한 명이라도 정직하게 말한 것을 거짓말이라고 오해했을 때 생길 파장이 없어야하겠기 때문이다. 거짓말 전과가 있다고 해서 지금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상황 증거, 혹은 심증일 뿐, 그러니 그저 전과를 현재의 진위를 판단하는 잣대로 삼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27 나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무조건 믿는다. '무죄 추정의 원칙(?)' 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엄청 속는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자위하고 있다. 어차피 내가 안 속으면 아이들은 제2, 제3의 방법을 개발하여 날 속여 먹을 것이다. 그러니 거짓말의 단수를 높이는 데 일조하기보다 그냥 속아주자, 하고 만다. 적어도 선생님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서 너무나 억울했다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물론 진실과 거짓을 분명하게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좋겠지만, 별로 뛰어난 판단력을 가지지 못한 보통 선생인 나는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29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이 '절박함'이라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배우자 이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 즉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 상황이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거짓말을 안 하고 정직해지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가정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난다. 이 거짓말을 끝내는 방법은 바람을 피우지 않는 길밖에 없다. 즉, 거짓말이 문제가 아니라 거짓말을 부르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람들은 거짓말을 멈춘다.
31 우리 반 K를 생각해보자. 그 아이도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 모른다. 밤늦게까지 알바를 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청소년 알바가 전부 유흥비를 위해서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그는 생활비를 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18세 소년에게는 유흥비도 절실한 필요비용이 되기도 한다), 밤새도록 인터넷으로 게임을 하며 자신의 시간을 망치고 있어도 이를 말려 줄 지각 있는 어른이 없어 늦잠을 잤을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이건 절박한 상황이다. 그 아이는 18세 소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적절한 보호'가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또는 마음이 아픈 것일 수도 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만사가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때가. 어떤 경우에는 그런 상황이 몇 년이나 계속되기도 하지 않던가. 이것도 절박한 상황이다. K가 놓여 있는 절박한 상황을 살피지 않고 그의 거짓말만을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33 거짓말 안 하는 나는 양치기 소년에 비해 선한가? K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가? 나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탈출하고픈 현실이 없었을 뿐이다. 힘든 노동과 외로움에 지친 절박한 현실이.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정직한 나와, 절박해서 거짓말을 한 소년 가운데 누구를 용인해야 할 것인가?
94 (...세상 모든 장난감들이 다 거기에 있었다... 갑자기 닥친 풍요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우왕좌왕하는 것이었다...) 풍족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옷장 가득 옷을 가진 사람일수록 외출할 때 입을 옷이 없어 절망한다. 마음에 드는 외출복이 단 한 벌만 있다면 그는 망설임없이 그 옷을 선택할 것이다. 외출은 해야 하고 그러자면 옷을 입어야 하는데 옷이 단 한 벌뿐이니까. 그래서 '여섯 벌 이하 입기 캠페인'이라는 것도 등장했다.
97 (결핍의 부족도 결핍이다) 언제든 원하는 것을 즉시 손에 넣을 수 있는 삶, 즉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진 삶이 특별히 더 행복하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우리가 돈으로 얻고자 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need, 즉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want, 즉 용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원하는 것이 생겼을 때 그것을 위해 기다리고 노력하는 시간들도 물건을 손에 넣어 누리는 시간만큼이나 즐거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기다리고 노력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들지 않겠는가. 결핍이 줄 수 있는 행복도 있는 법이니 결핍이 부족한 삶도 일종의 결핍이다. 치명적인 결핍이다.
108 (학생들은 왜 등교할 때 슬리퍼를 신지 못하는가에 대하여) 이것은 앞의 두 가지에 비해 굉장히 솔직한 논리인데, 바로 "그렇게 억울하면 너도 선생해라"라는 것이다. 너랑 나랑 엄연히 신분이 다른데 같으면 재미없잖아, 하는 것이 바로 세번째 논리에 숨겨진 진실이다. 이 대답은 앞의 두 가지에 비해 무척 무성의해 보이지만 교육적으로 가장 덜 해로운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논리에는 교육이 아닌 것을 교육으로 위장하지 않는 미덕이 담겨 있다. 세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답변을 들으며 적어도 학생들은 학교에 교육의 논리만이 아니라 정치의 논리가 아주 강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 냉소적이라는 비판이 돌아올 것을 감수하면서 감히 말하자면 이 세번째 부류의 답변에는 보다 본질적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약간의 의의도 있다.
116 정말 학교에는 교육도 아니면서 교육인 척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150 왕비가 요술 거울에 매달렸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왕은 젊고 아름다운 다른 여자에게 빠져 있을지도 모르고, 워낙 정무가 바빠 왕비와 대화를 나눌 시간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또 따지고 보면 왕과 왕비의 사이 자체가 소소한 대화로 이어지는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요술 거울은 다르다. 왕비가 질문하면 언제나 지체 없이 대답을 들려준다. 그것도 바람직한 대답을. 언제도 내 말을 경청해주고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 주는 존재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그런 역할이라면 왕비의 시중을 드는 아랫것들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왕비는 바보가 아니다. 부리는 사람들이 왕비님이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라고 답할 때 그 말을 100퍼센트 믿을 수 있을까? 내가 저들의 목을 쥐고 있는데 어찌 내 비위를 거스르는 진실을 말하겠는가? 저들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할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말에 희희낙락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라는 것을 왕비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요술거울은 다르다. 요술거울은 거짓말을 말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다. 요술 거울은 왕비에게 잘 보이지 않아도 이미 그 자체로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술 거울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왕비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 내게 좋은 말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내게 좋은 말을 해주는 존재, 진실만을 말하는데도 내게 좋은 말을 해주는 존재, 정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156 하지만 거울은 거울일 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 무엇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온기와 애정이 담긴 대화를 대신할 수는 없다... 셀카를 찍고 뽀샵한 사진을 싸이에 올리는 거울 공주에게 이 거울놀이는 안전하다. 절대로 상처 입을 염려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 자체로 행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잠깐일 뿐이다. 지속되지 않는다. 거울이 줄 수 있는 위안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거울에서 시선을 돌려 사람을 보라. 거울 밖 세상의 나는 보잘 것 없고 세상이 나를 1순위로 맞아주지도 않지만, 그래도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지 않은가.
202 학교에서 만나는 수많은 야수들을 구태여 왕자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 일이다. 왕자가 될 가능성도 적고 왕자가 된다 해도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가능성도 적고 결과도 만족스럽지 않은 일에 우리가 왜 그토록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은 자라 들판으로 나갈 것이고, 야수로서 척척 삶의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이다. 공부는 못해도 다른 재주가 있으면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불행히도 재능은 공평하게 부여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어서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하나를 못하면 다른 것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야수들은 공부를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재주도 없다. 의욕도 없다. 하지만 괜찮다. 이것저것 다 못해도 된다. 잘하는 것 하나 없어도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 하나만 있으면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괜찮다, 다 괜찮다. 툭하면 112에 전화를 해 교사를 신고하고 교사에게 욕설을 날리고 폭력도 행사한다며, '요즘 아이들'을 염려하고 이 사회의 내일을 걱정하는 많은 이들이여. 마음 놓으시라. 그래도 아이들은 여전히 교사의 소소한 칭찬 한마디에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고 수업 시간에 우연히 정답을 맞히면 그 성공의 기쁨으로 몇 날 며칠을 보낸다. 그들이 왕자였다면 어림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왕자가 아니라서 또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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