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해들/오늘의

거머리

by 새 타작기 2016. 6. 8.
형 생일을 기념하며 식구끼리 밥을 먹기로 했다.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지만 주머니 사정으로(돈도 돈이지만 형제 사이에 선물을 하지 않은 지는 꽤 됐다. 선물을 하는 건 오히려 어색해, 라는 이유로 난 항상 형 생일을 넘어가곤 했지) 이번에도 그냥 생일상 무임승차. 생각 같아선 모임 자리에서도 빠지고 싶지만.

식사 비용은 아버지가 내기로 하고, 식사에 대한 모든 계획은 내가 세우기로. 계획이랄 게 뭐 있나, 모든 계획을 알아서 대신 해 주는, 프랜차이즈 뷔페로 정했다. 한식차림으로 유명한 ㄱ식당. 주말이라(형 생일은 원래 쉬는 날. 이틀 당겼음에도 쉬는 날) 전화 예약은 안 되고, 현장 접수만 됐다. 40-50분 기다리라는 직원의 말에, 난 가족들에게 30분 남았다고 전하고(곧이곧대로 말하면 장소를 옮길 것 같았다), 예상보다 빨리 20분 만에 입장했다.

차림에 부모님은 대체로 만족하셨다. 어머니가 접시를 네댓 번 바꾸셨으니 음식 맛은 깔끔하고 좋은 것. 나도 세 접시 쯤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내가 퍼 온 불고기에 곁들인 미나리에서 무언가 밥상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 떨어진 게 무언지 가까이 들여다 보니 갑자기 그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왓! 거머리였다. 그걸 보고 식구들은 기겁을 했지만, 알고 보니 그 거머리는 굴러들어온 복같은 녀석이었다. 정말 복같네 이거.

형수가 불러 온 직원은 그걸 보더니 매우 당황스러워 했고, 직원이 데려 온 매니저는 그걸 사진으로 찍더니 접시째 회수해 갔다. 그 과정에서 속 시원한 사과 한 마디가 없어 어떻게 반응을 해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다시 나타난 매니저는 "죄송합니다. 저희 미나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해당 메뉴는 모두 철수시켰습니다. 식사비용은 저희가 계산하겠습니다. 불쾌하셨을 텐데 남은 시간이라도 편안히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돌아갔다. 화내지 않고 기다리니 알아서 처리하는구나. 역시 모든 걸 알아서 다 해주는 대기업이야. 친환경 미나리에 생일 고객에게는 식사 무상 제공이라니. 굳이 준다는데 마다하지 않지 난. 아무튼, 당연한 대처를 해 주어서 고마웠다. 그 당연한 걸 받아본 지가 오래 돼서 말이지. 그나저나 어머니의 반응도 의외였다. 평소 불같은 아버지는 정작 가만히 있는데, 얌전하신 어머니가 '식구들 입맛이 다 떨어졌다며' 조용하고 단호하게 따지시니 매니저가 꼼짝을 못했지 아마. 입맛 떨어진 어머니는 다섯 접시인가 드시고 과일에 커피까지 깔끔하게 드시고 나왔다.

아무튼, 형 생일이라고 뭐 하나 준비한 것 없는 동생이 거머리 덕에 모쪼록 어깨 편 날이었다.

ㅡ160604, 형 생일 이틀 전


'오해들 > 오늘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16.06.08
바지  (0) 2016.06.08
승우  (0) 2016.05.27
160527 오늘식물  (0) 2016.05.27
160523 오늘식물  (0) 2016.05.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