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식의 말이라면 나도 모레 아침까지라도 할 수 있는데.
만약 늘 곁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 지 방법도 모를 것이고(당장 달려가도 시원찮을 때에 앉은자리에서 뜨개질이라니, 근데 뜨개질밖에 생각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지금 연락을 해야할 지 말아야 할 지 청승맞게 탭댄스를 출 거고(장문의 문자를 썼다가 이모티콘을 지우고, 느낌표를 마침표로 바꾸고, 몇 개의 단어를 지우고, 결국 다 지우고, 주춤주춤), 오지 않을 그의 연락을 두 귀 쫑긋 세우고(환청이 들리기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못하겠지.
오래 사귀면 내가 사라진다는 말도 알 것 같다. 네가 없는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았더라. 혼자서 뭘 해봤어야 말이지 몇 년 동안.
***
귀의 생김새라든가 배고플 때의 표정이라든가 주로 오후 3시에 연락을 해온다든가 그런 식의 말이라면 내일 아침까지라도 할 수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라졌다면 씻어서 엎어놓은 머그잔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빠져나갔다면 발자국이 어느 쪽으로 났는지 찾아낼 수 없다면
다시 시작하기 위해 뜨개질을 할까요 후추나무는 이제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서 있고 바람은 결심을 할까요 구름은 실족할까요 의자가 주춤 손가락이 주춤 이러다 탭댄스라도 추겠어요 주춤주춤 대문을 넘어선 오후 3시가 두 귀로 쏟아지고 있는데
나는 언제 사라진 걸까요
ㅡ「오래 사귀었으니까요」,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임승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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