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 김치볶음밥을 먹고 싶은 권리와 내가 김치볶음밥을 먹이고 싶지 않은 권리, 둘 중에 어떤 권리가 중요해요?" - 피해자의 아내
연극 내내 두 권리 중 무엇이 존중받고 있는지 주목하였다. 사형수의 형 집행을 앞두고 벌어지는 일들은, 피해자 가족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사형수에게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 대접하기 (그 음식은 피해자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기도 하다), 사형수의 추억이 담긴 놀이 하기 (누구한테는 좋은 추억이 누구한테는 아플 수도 있다), 사형수의 마음이 편해지도록 찬송가 불러주기 ("마음이 편해지도록이요?"), 사형수의 인권을 지나치게 고려하다보니 피해자의 가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집행 매뉴얼 (교수형에 쓰이는 밧줄의 두께는 어떠해야 하고, 재질은 사슴가죽이어야 하며, 매듭은 어떻게 지어야 한다는둥), 그런 매뉴얼을 곧이곧대로 따르기만 하는 집행과장이 한다는 말이, "수형자를 모욕하는 일은 삼가주십시오."
연극에서는 그래도 피해자의 가족이 형을 직접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마저 없다. (개인에게 보복을 맡겨두면 한두 배가 아니라 열 배, 스무 배의 복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동해보복의 딸리오법이 만들어졌고, 그 형벌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집행하라고 시민들은 국가에 역할을 위임했다 -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형 집행 과정에서 피해자의 가족이 내세울만 한 권리는 거의 없다. 그나마 피해자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권리 중에, 가장 존중받아야할 것은, 아마 가해자를 (그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고) 용서할 권리일 것이다.
국가도, 가해자도, 심지어 그들과 상관없는 제 삼자들도 지나치게 빠른 용서를 강요한다. 국가가 제시하는 매뉴얼은 이미 피해자가 용서했음을 가정한 듯 하고, 가해자는 피해자의 용서와는 상관 없이 처벌 앞에 당당하며, 제 삼자들은 피해자에 대하여 공감 아닌 공감을 하다가 이만하면 용서할 만하다며 너무나 쉬운 사랑을 강요하고, 심지어 용서 받지 못한 가해자를 동정하기도 한다.
"쿵!"
사형수가 사형대로 올라가고, 피해자의 가족이 뒤따라 올라가고, 지체 없이 의자가 떨어진다. 어떤 극심한 형벌도 피해자나 그 가족의 고통과 복수심을 충족시킬 수 있을리 없다. 도리어 또 하나의 생명을 내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남은 일생 내내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를 전혀 위로해주지 못할 그 행동을 왜 했느냐고 어느 누구도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나치게 빠른 용서와 너무나 쉬운 사랑을 강요해 온 우리가 '피해자들'이 스스로 용서하고 사랑하게끔 기다려 주지 못하고 구석으로 몰고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동토유케>, 김광보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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