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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 분위기가 나쁘게 말하자면 향상심이랄까, 아무튼 신분상승 욕망이 별로 없어도 되는 사회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걸 업종과 상관없이 높이 인정한다. 이 업종은 불법적인 걸 빼면 거의 다 포함되는 것 같은데, 심지어 호스트나 호스트시도 업계의 넘버원이라면 인정한다. 미용이나 요리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엄청난 전문가가 되지 않아도 성실하게 자기 할 일 알아서 하면 그냥 저냥 살 수 있다. -46쪽
'대학 그딴 게 뭐가 필요하냐. 진짜 배움(學)을 더 물어 보고(問) 싶어 하는 사람만 대학에 가면 된다' -47쪽
본능에 충실한 떼도 부릴 줄 알고, 적당한 자기 어필도 했을 것이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땐 울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그러한 행동과 심리의 근저에는 엄마, 아빠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가장 우선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대화하고 싶은 욕구다. -52쪽
부모도 사람인지라 서넛 낳아서 기르다 보면 더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기 마련이다. 나도 특별히 좋아하는 아이가 물론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마음으로만 간직해야 한다. 흔히 하는 실수가 '비교'다. 언니만큼만 해라, 동생만큼만 해라, 쟤는 저렇게 잘 하는데 넌 이게 뭐니 등등. 이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비수가 되어 심장을 후벼 판다. 그런 느낌을 주지 않으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85쪽
나는 절대 아이를 때리지 않는다. 내가 많이 맞아봤기 때문이다. 그런 유년시절을 돌이켜보면 맞는다고 뭔가를 제어하고 그러진 않았던 것 같다. -89쪽
하지만 그럴수록 져야 한다. 누가 봐도 내가 잘못했고, 아이가 맞는 말을 하는데 괜히 아빠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면, 그리고 그것이 몇 번 반복되면 아이는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아빠의 영(令)이 설 리가 없고 결국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111쪽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거리에서 장애인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장애인이 별로 없나 보다'라고 단순히 생각했는데, 16년 전 일본에 온 이후부턴 거의 매일 한두 번 정도는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목격한다. (중략) 어느 사회에나 장애인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만 한국은 밖에 안 나올, 아니 못 나올 환경인 것이다. 혼자서는 움직이기 불편한 도로 사정도 있겠고, 사회적 편견도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어느 정도는 남아 있을 것이라 본다. -125쪽
"맞아요. 아무도 안 뽑은 번호예요. 이 말은 다르게 말한다면 모두가 뽑은 꽝번호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한 장씩 뽑고 마지막에 남겨둔 거니까요. 그럼 이 꽝번호를 제외하고 그 다음 번호부터 27명까지가 합격자 번호입니다. 남긴 번호 다음부터 한다는 건 미리 나눠드린 추첨방식 용지에 표시했으니 이건 룰이라고 보시면 되고, 저희 나름대로 이 추첨 방식이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2000년부터 채택하고 있습니다." -139쪽
"OO야, 주위를 한번 둘러봐. (아이가 짜증을 내면서도 둘러본다) 어때? 여기 사람이 많아, 적어? (많아요) 너희처럼 먹는 거 가지고 싸우는 애들이 있는 거 같아? (모르겠어요) 왜 몰라? 둘러보면 알 것 같은데. 한번 다시 봐봐.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왜 너희들만 시끄러울까? 게다가 여기는 먹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뷔페식이니까 굳이 형 거를 달라고 하지 않아도 다시 가져올 수 있고, 또 넌 동생이 그렇게 달라고 하면 그걸 주고 다시 가져와도 되잖아?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144쪽
아! 확실히 균형 안 맞다. '꿈을 처음부터 너무 크게 써버리는 바람에 '실현'과의 균형이 깨졌다. 유나의 글씨가 잘 나온 바람에 더 비교된다. 미우 표정이 울상이 된다. 신년휘호는 무조건 한 번에 써야 한다. 두 번 쓰고 그런 게 없다. 운수 보기를 한 번만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위로했다. "꿈이 너무 커서 그런가 봐. 미우는 올해 6학년이고 내년엔 중학생이 되니까 아마 하고 싶은 것들, 그러니까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글에 표현된 거지.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고 도 너의 꿈들이 이 글자 덕분에 다 이뤄질 것 같은데?" -155쪽
"준이 하고 싶다고 해야 보내지. 걔가 좋아할까?" 그때까지 우리는 '강요하지 않는 교육'을 막연하게나마 실천해왔다. 가령 숙제만큼은 하라는 것도 '공부에 뒤처지면 안 된다'같은 개념이 아니라 '숙제는 선생님과의 약속이니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말한다.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선생님이 슬퍼하실 것 같은데, 선생님이 너 때문에 울고 슬퍼하고 기분 상하고 그런 거 좋아? 라는 식으로 말하면, 숙제는 무조건 다 하게 되어 있다. 물론 그다음부터는 '네 맘대로 해도 된다'를 반드시 넣어줘야 한다. -161쪽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건 이렇게 자기들이 먼저 하고 싶다고 말을 꺼낸 것들은 일단 오래간다. (중략) 애초에 자기들이 하고 싶다고 한 거라 빼도 박도 못한다. 우리가 강요해서 한 거라면 언제든 "내가 한다고 한 게 아니잖아"라는 핑계를 대고 관둘 수가 있는데, 그 이유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버리니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뭐 그들도 즐거워하고. -162쪽
육아를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별거 아닌 이런 대화가 분명 중요하다. 아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한다. 다짜고짜 '하지 마'라고 말해버리면 아이는 일단 안 하기는 한다. 하지만 아이들도 이내 알아버린다. 부모가 나를 귀찮아하는 것을. 그리고 이해가 안 되기 시작한다. 왜 나를 귀찮아하는 것일까라며 혼자 고민한다. 하지만 그 고민을 부모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고민의 원인 제공자가 부모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트라우마, 소외, 고독감은 그렇게 생겨난다. -168쪽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순간의 기억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성장과정은 매일 같이 보낸다고 해서 알아가는 게 아니다. 한 달, 두 달을 못 보더라도 몇 번의 순간을 아이와 함께 공유하고 기억한다면 나중에 그 공유와 기억을 씨줄 날줄로 연결시켜 소중한 추억으로 만들 수 있다. 그 추억이 켜켜이 쌓여 현재가 되는 것이고. 밀도와 집중력은 아이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가장 중요하다. -181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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