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도사'로 장기를 두면 좋은 점 하나. 그 어플에는 방금 둔 수가 호수(好手)인지 악수(惡手)인지 금방 알게 하는 장치가 있다. 0.00점부터 시작하여, 잘 둔 수라면 (+), 못 둔 수라면 (-)로 점수가 시시각각 변하는 방식이다. 만약 내 졸(卒)을 하나 잃게 된다면 -2.54, 상대방의 마(馬)를 하나 잡게 된다면 +5.72, 이런 식이다. 장기 초반에는 줄다리기를 하듯 시작점 '0'에서 작은 폭으로 당기고 끌려가는 식이다가, 장기 중반 어느 한쪽이 균형을 잃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이든 (-)이든 점수가 한쪽 끝으로 치닫는다. 장기가 어느 정도 두어진 상황에 점수가 +5~10점대만 유지된다면 그때부터는 나의 기물과 상대방의 기물을 맞바꾸는 식으로 장기만 두어도 무난히 이길 수 있다. 반대로 -5~-10점대라면 상황을 역전시킬 과감한 묘수를 끊임없이 노려야 한다. '점수로 판세를 볼 수 있고 모든 수마다 즉각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마추어 장기 실력을 가진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도움.
카페에 마주 앉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도 장기처럼 점수가 표시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럴 리 없다. 현재 '내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나'의 점수는 아마 -22.41점 정도? 엊그제 장고 끝에 악수를 두어 차(車) 하나와 포(包) 하나를 떼였다. 열세를 만회하고자 무리수를 두었다가 상대에게 큰 생채기를 낸 까닭이다. 오늘이라고 시작이 좋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가 먼저 연락해도 시원찮을 판에 잔뜩 슬퍼하고 실망하고 있던 상대가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있는 수(상대 입장에서는 비참한 수)를 둔 것이다. 이로써 나는 오늘도 처음부터 사(士) 하나를 잃고 아슬아슬한 대화를 시작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고 집중했다. 방금 던진 말이 행여나 악수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 서운했던 것을 이야기할 때는 주어를 '너'로 두지 않고 '나'로 두었다. 부탁할 게 있으면 내가 그동안 못해온 것부터 인정했다. 상대가 서운한 것을 꺼내며 이야기한 것을 또 하고 또 하고 반복수를 둘 때면, 말 자르지 않고 차분하게 끝까지 들어주려 노력하였다. 상대의 표정과 음색, 기운을 통하여 내가 건네는 말들이 (+)로 가는지 (-)로 가는지 헤아려보지만, 고수는 역시 포커페이스. 궁지에 몰린 나에게 초읽기가 없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날 장기 결과는, 나의 완패. 교훈을 하나 얻었다면, 이기려 들지 않는 것. 지는 것도 아등바등 점수패가 아니라 화끈하게 완패가 좋다는 것. 호수였는지 악수였는지 지금도 알 수는 없지만 나의 말들이 당신 마음 속 상처 위에 조금이라도 살포시 덮혔기를. "미안합니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첫 수로 졸(卒)을 열어 차(車)를 내어줄 용의까지도 있어요. 하물며 면도 귀도 곁도 다 열어둘게요. 나의 기물을 다 내어 주어도 좋습니다. 다만 궁성 안의 마지막 기물 하나만 남겨줘요. 나도 지키고 싶은 것 하나쯤은 있답니다. 아무쪼록 미안합니다."
ㅡ160118 이수역 투썸플레이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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